獨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

Posted 2005. 3. 16. 20:30
단순한 유리공간이 진실을 일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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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솟은 수평면과 하늘에 떠 있는 수평면, 두 수평면 사이에서 어떠한 기능도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투명한 공간을 건축가는 ‘보편적 공간’(유니버설 스페이스.universal space)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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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유리창에 반사돼 외부 풍경과 내부 풍경은 아름답게 겹쳐진다.

건축이 창조적 산물이라고 하지만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다른 것을 본받아 답습하고 있을 뿐인 아류이다. 그러나 그런 아류들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한 시대를 결정 짓는 건축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형적 건축이라 부른다. 이 건축 원형은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다. 그 원형질을 만든 건축가의 싱싱한 생명이 그 건축 속에 무서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세기 건축의 원형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함 없이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1886~1966)가 만든 20세기 최대의 혁명적 건축,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을 그 예로 든다.

나치의 광기가 남긴 상처를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먼저 세우기를 원한 것은 무너진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들 도시의 문화적 상징인 베를린 필의 음악이 그들의 회한을 위로할 유효한 치유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치가 세우려 한 도시의 중심축이었던 티어가르텐 지구 남쪽에 있는 켐퍼 광장을 택해 새로운 음악당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곳은 전후 또 다른 이념 분쟁으로 동과 서를 가른 베를린 장벽이 있는 포츠담 광장에 이웃한 곳이었다.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의 건축가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을 다시 문화의 도시로 환원시켜야 할 당위를 내세우며 '문화 포럼'을 이곳에 세울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동베를린에 대한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고 싶어하는 서베를린 당국을 대단히 매료시키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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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이 완공된 후 문화적 성취에 고무된 당국은 국립미술관 신관을 계속해서 짓기로 하고 베를린을 24년 동안 떠나 있었던 세계적 거장 미스를 건축가로 초빙해 문화도시의 완성을 그리게 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며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만들어 근대건축의 일대전기를 마련했던 미스 판 데어 로에, 1962년 당시 76세의 이 노장에게 베를린은 잊을 수 없는 건축의 고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바우하우스의 교장까지 하면서 새로운 건축이념인 '기술'에 대한 이념을 세웠으나 결실을 보기 전 나치 정권의 반문화적 행태에 의해 좌절되고 떠나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미국에서 만개했다. 기술이 건축의 일개 수단이 아니라 20세기 세계 자체였던 그에게, 38년 이민지로 택한 철과 유리의 도시 시카고는 약속의 땅이었으니 그는 거기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마침내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가 오랜 건축 세월을 정리할 즈음에, 결코 잊지 못하는 땅 베를린에 세워질 이 미술관의 설계 의뢰는 그야말로 그의 건축의 정수를 집중할 마지막 기회였으며,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의 지나간 모든 역정이 있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유작이 된 이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에서 그가 이룩한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이 미술관을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상설전시는 포디엄이라 칭한 기단부에 두고, 그 위에 8개의 가느다란 철제 기둥으로 지지되는 64.8m 크기의 정방형 지붕을 띄운 후 그 속에 투명한 공간을 만들어 기획 전시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건축은 마치 두 개의 수평면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땅에서 솟은 수평면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 떠 있는 수평면이다. 이 두 면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비어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거나 불과 8개의 가느다란 외부기둥 혹은 기둥 없이 뻗은18m 길이 지붕의 기술적 성취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두 수평면 사이에 창조된 투명한 공간이다. 이곳은 기획전시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하나, 딱히 어떤 기능이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떠한 기능도 다 수용할 수 있으며 모든 기능을 또한 만들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는 이를 유니버설 스페이스(universal Space)라 불렀다. 보편적 공간이라고 번역함직한 이 공간 개념은 21세기 건축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다.

과거의 건축에서 벽체는 두 가지 목적으로 쓰였다. 하나는 지붕을 지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방을 구획하는 것이다. 지붕을 띄울 수 있는 통찰적 기술을 가진 미스에게 벽은 완전히 자유로운 장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미스의 건축은 과거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축, 그래서 둔중하고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건축, 즉 내부와 외부가 서로 만날 수 없는 건축과 모든 면에서 다른 건축이다. 그것은 테제(These, 正)와 안티 테제(Antithese, 反)의 문제였으니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르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이 미술관을 방문한 날은 겨울날 진눈깨비가 막 그친 오후였다. 인근의 베를린 필 하모니 홀과 국립도서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이곳으로 접근하던 나를 즐거운 기분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미스의 검은 지붕이 내 시야에 나타난 순간 나는 거의 호흡을 정지해야 했다.

엄청난 긴장이 엄습한 것이다. 건축의 원형을 조우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긴장이었다. 특히 이 미술관의 주변 포츠담 광장은, 통독 이후 막강한 서양 자본이 물밀듯 들어와 온갖 현란한 형식의 상업주의 건물로 또 다른 장벽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진 이 미술관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장엄한 기품으로 그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20세기의 파르테논을 보는 듯했으며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 건축의 본질적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포디엄에 올랐다. 지면으로부터 불과 90㎝ 정도의 높지 않은 기단이지만, 수평면에 다다른 순간 이미 주변의 도시로부터 구별된 공간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일상의 생활에서 탈피한 듯하고 어쩌면 폐허로 남은 아크로폴리스의 고요함에 도달한 듯했다. 도시는 이미 저 멀리 아래에 있고 나는 광활한 평원 위에 떠 있는 검은 철제 지붕 속으로 흡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지붕 아래 내부를 둘러 싼 16㎜ 두께의 투명유리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그 유리는 주변의 풍경을 투명한 유리상자 안으로 전달하는 매개적 장치였으며, 그 장치 위에는 방금 갠 하늘의 구름이 반사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하였고 끊임없이 내외부를 교류시키고 투영하며 반사한다. 이 신비의 건축은 도시 속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유리문을 밀고 내부로 들어가면 주변의 도시 풍경은 이 투명한 공간을 둘러싼 벽이 된다. 내부의 공간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 풍경에 의해 유쾌하게 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침묵을 가져다 준다. 폐쇄되어 고정된, 그래서 목적이 없어지면 공간마저 없어지는 그런 구시대의 건축과는 확연히 반대 입장에 있는, 항상 살아 있는 공간인 것이다.

미스의 전기작가 프리츠 노이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혹은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혈안이 되어 유행병처럼 부질없는 사기 행각의 건축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을 때 미스가 만든 이 건축은 시적 진실함과 구조적 정직함에 대한 깊은 열망을 많은 사람에게 일깨우는 참으로 신선한 자극제다."

90세가 된 노장은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건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69년 영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 투명한 건축 속에 진실의 언어를 가득 담아,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혁명할 것을 외치고 있으니 경외롭고 경외롭다.

로마, 나치…그 모든 역사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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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의 슬픈 과거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문화복합시설인 쉬른 미술관을 지어 로마시대로부터 현대까지 정확한 역사인식과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한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 지점. 왼쪽 쉬른 미술관과 나란히 로마시대의 유구(遺構)가 보인다(上). 옛과 지금이 거의 변화가 없는 뢰머 광장.

몇 년 전 문민정부 시절에 조선총독부였다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광복절 기념식에 맞추어 건물의 머리부분을 동강내고 이를 들어올려 축제를 펼친 일을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경을 보며 나는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 등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문화에 관한 용어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었다.

그 후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가짜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나는 조선총독부를 영구히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반(反)개발론자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개발과 보존이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 이해되고 그로 인해 숱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내가 믿기로는 개발과 보존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이 가져오는 방치는 환경을 오히려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분명한 적은, 새 역사 창조라는 허구적 어구를 앞세워 과거 사실들을 멸실하는 반달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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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축은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재개발도 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건축이 바뀌더라도 수많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새겨졌던 삶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켜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규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뢰머베르크광장과 쉬른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부터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마인강변에 새롭게 세워 현대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보인 프랑크푸르트지만 이 도시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중세 이후 이 도시의 중심으로 시청사가 있었던 뢰머광장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나, 이곳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제일 먼저 복구하고자 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 장소였다.

그들은 맨 처음, 이 광장을 면하는 간선도로변에 현대식 쇼핑센터를 지어 그들의 경제부흥을 알리고자 했으며 이 화려한 새 건축이 자랑스러운 미래를 상징하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피막을 가진 상업건축이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역사적 장소가 가진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고 이 경박한 건축을 이내 후회하게 된다.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뢰머광장 주위에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건축물들을 보다 더 역사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로써 아마도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패전의 기억마저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후회했다 한다. 이 뢰머광장에 일어났던 슬픈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나타난 옛 모습들은 도시의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마치 이상한 요술나라를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 건물들은 박제된 세트였지 건축이 아니었다. 그들 나치시대의 악몽과 패전의 슬픈 과거를 감추려 한 이 세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더욱 손가락질받게 되는 자괴의 감정도 함께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80년,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현상 공모하여, 베를린 출신의 젊은 건축가 반게르트와 얀센, 숄츠와 슐테스가 이룬 협동 팀의 설계안이 당선함으로써 이 뢰머광장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로마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문화역사 도시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쉬른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건축은 3000평 정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전시관과 음악학교와 미술공방 그리고 몇 개의 숙박시설과 소규모 문화상업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건축물들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적 장치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도시적 유기체로 개념을 설정하였고, 정확한 역사인식과 면밀한 주변 맥락의 분석을 거친 이 새로운 건축은 뢰머광장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게 된다.

대성당에서 시청사에 이르는 150m 길이의 공간에 옛날 길이 있었던 위치에 다시 길을 만들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부분은 건물로, 광장은 다시 광장으로 안과 바깥을 만들고 그들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그 길을 따라가는 동안에, 로마시대의 유적도 만나고 카롤링거 시대의 유적도 만나며, 근대의 비극도 만나고 현대의 시간과 흔적을 실제와 상상 속에서 부딪히는 무한한 시간여행을 하도록 한다.

때로는 긴장하면서 때로는 이완되도록 다양하게 조직된 이 속의 공간을 체험하면서, 내.외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회랑과 길과 복도를 따라가다 중앙 로툰다로 나오게 되면 둥근 홀 속에 혼자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0m가 넘는 길이의 좁고 긴 열주의 모습은 마치 대성당과 뢰머광장 사이에 잠시 끊어졌던 역사의 공백을 강렬하게 접속시키는 듯하며, 그 앞 마당에는 지난 시대 유구들이 그냥 부서진 채로 있어 마치 버려진 듯하나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속에서 역사가 적층된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쉬베르트페르게쉔'이라고 이름했던 길은 그 앞에 '옛날의'이란 단어를 붙여서 새 길의 이름을 표시하였는데, 한 노인이 손자인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다가와 벽에 붙은 그 길 이름판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적 이곳, 이 거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게다.

우리는 어떨까. 자기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재개발지구로 확정되었다고 하여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희희낙락하는 우리들. 아무리 건축이 문화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상실을 축하하는 우리들의 정체는 유목민인가.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다른 흙으로 돋우어 올리는 것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의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찬 마음으로 그 묻히는 땅을 보았다….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삶의 족적을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건축은 강력한 기억장치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총체적 문화인 건축을 통하여 확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건축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서울은 도무지 6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믿기 힘든 급조된 풍경이다. 아무리 경복궁을 복원하여도 박제일 수밖에 없는 그런 건축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악다구니하는 지금의 도시풍경이 천박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 터인 한, 그 기억을 재개발 속에 남긴다면 그것은 진실의 건축이며 귀중한 현대의 유적이 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짓고 너무도 쉽게 허무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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