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미술관의 문제점
Posted 2005. 3. 16. 20:28미술관 건축의 다양화를 위하여
함성호/ 건축평론가
Museum과 Gallery
국제박물관의 의의(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 ICOM)의 정의에 따르면 'Museum'은 문화적 또는 학술적 의의가 깊은 자료들을 수집하여 그것들을 연구·교육 및 취미와 여가를 위하여 보관하고 전시하는 상설기관은 모두 박물관으로 간주한다. ‘Museum’이 비영리적이고 공공적인 전시를 하는 장소라면 ‘Gallery’는 미술품을 하나의 상품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유통구조의 한 체계를 담당하는 영리성을 띤 전시장이다. 따라서 그 공간의 요구조건에 있어서도 ‘Museum’과 ‘Gallery’는 상당부분 그 기능을 달리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Museum’이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는 흔히 낡고 유행에 뒤진 대상을 두고 말할 때 ‘박물관으로나 보내라’고 말한다. 무심코 내뱉는 대중들의 이러한 언설 속에서 우리는 박물관에 대한 대중의 인식체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선, 박물관이란 의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즉, 앞서 말한 ‘ICOM'의 정의 중에서 연구· 교육의 장소로서의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순한 유물의 집합소, 다시 말하자면 값나가는 고물 수집상의 이미지가 그 언설 속에서 보이고 있다는 말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러한 대중의 인식이 그릇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주요 미술관이 고고 미술관의 성격이 짙은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어느 나라에서건 간에 마찬가지이고 문제는 그러한 따분하고 지루한 성격의 박물관을 어떡하면 재미있고 신나는, 교육과 연구가 의도되지 않고서도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배워 나갈 수 있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일깨우느냐 하는 것이 미술관 건축의 우선적인 해결과제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Gallery’의 공간은 훨씬 더 단순하다. 왜냐하면 ‘Gallery’를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 어떤 목적성을 갖고 있다든지 아니면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그림이나, 수집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품을 살수 있는 구매가능 고객이거나, 적어도 장래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Gallery’의 공간은 철저히 그러한 고개들의 구매 가능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들의 등선을 매끄럽게 해야하고 가능하다면 전시된 그림들의 진가를 최대한으로 어필하여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Museum’과 ‘Gallery’의 공간해석의 차이점에서 우리나라 미술관 건축의 대중적인 해결책이 존재하고 아울러 한국 미술관 건축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과시적인 미술관 건축
3공화국 발족 이후인 1966년에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추진위원회 규정이 공포되고 문화시설에 대한 정부 투자 사업이 시작된다. 그러한 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바로 그 해 국립박물관(현 민속박물관) 현상설계가 이루어지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1971년에는 국립 부여박물관이 신축 개관한다.
그리고 1974년 제1차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예술부문 예산을 59억여원으로 책정하는 한편 ①문예진흥기반 조성을 위한 제도의 시설을 마련하고 ② 문화유산의 계승개발 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③예술창작활동에 대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④해외 문화 활동을 의욕적으로 벌여나간다.
그러한 1975년과 1978년 사이에 국립광주박물관이 신축 개관하고 1978년에 광화문 네거리에 10여년에 걸친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게 된다. 일단 세종문화회관이 준공됨으로 해서 제3공화국의 문화예술 정책은 그 대단원의 한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제 우리는 단순한 연대기적인 나열을 피해 미술관 건축을 중심으로 어떻게 당대의 건축공간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그러한 수준에 따라 드러난 건축공간의 문제점들이 현대 한국 미술관 건축의 문제점이기도 할 것이다.
박물관의 특징은 좌우 대칭
먼저 이때의 주요 건축물인 국립민속박물관이나 국립공주박물관의 평면적인 특징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Symmetry는 서양건축사의 사원건축이나 공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입면의 전통이지만 억지스러운 Symmetry의 강조는 전시용선에 무리를 가져왔고 그 기능에 있어서도 관람자의 흥을 깨 즐겁게 미술품들 사이를 산책하듯이 즐기기보다는 Symmetry가 주는 외관의 장대함과 단순성의 강조로 인해 기념성만 강조하는 건축 어휘를 낳았다. 특히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의 전통 시비는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이나 법주사의 팔상전, 금산시의 다목전 같은 국보급 목조양식을 콘크리트로 그대로 찍어내어 그것이 곧 전통계승이나 전통의 재해석인양 당선만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러한 왜곡된 전통의 첫 출발이야말로 이후 한국건축의 전통 논의에 있어 위압적이고 화장술적이며 장식적인 전통건축이 득세할 수 있는 첫 준거가 되어주고 있다(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의 어느 건축가도 그러한 전통을 전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건축어휘로 소화해내는 과정에서 오류를 되풀이해 왔다).
아무튼 ’80년대의 전통 논의가 보다 여유있는 수용의 폭을 가지고 자유로운 견해를 통해 이야기되어지던 것과는 달리 1966년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추진위원회 규정 공포로 시작된 당시의 전통 논의는 논의가 부재한 전통이었다. 그래서 각 국보급 건축물의 짜깁기로만 세워진 미학이 결여된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했고 우리문화 현상의 기형을 양산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복궁 중앙박물관의 시비가 우리의 전통에 대한 박제화가 문제되어 일어난 논의라면 바로 그 이듬해 신축 도중에 전통 시비에 걸려 중단되고 사회여론화한 김수근씨의 부여박물관의 왜색시비는 한국 전통 건축의 변별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주로 형태상의 문제였지만 일본 신사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많은 반발을 산 작품이었다. 비록 일본과의 협정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한·일 협정을 반대한 수많은 국민들의 의식 속에 숨어있는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감이 자연스럽게 부여박물관의 왜색시비로 나타난 것이었다.
왜색시비의 논리 일단락
어쨌든 작가 자신이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본풍의 형태가 도출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일본식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모호한 논리로 일단락되고 1971년 개관되었다. 다시한번 우리의 전통 논의는 한국건축의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 특수성과 보편성은 빈 란으로만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6, 70년대의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거대하고, 거국적인 문화사업을 펼쳐나간다.
1982년 독립기념관 준비위원회가 발족한다. 같은 해 문화진흥법이 개정되고 1984년 국립진주박물관이 신축, 개관되며 예술의전당이 현상 공모된다. 그리고 바로 이 해 서울시 대형 건물에 있어서의 예술장식을 의무화한다.
제5공화국 헌법 8조에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국정지표에 ‘문화창달’의 슬로건은 제6공화국의 문화정책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즉 독립기념관 건립부터 시작한 문화정책은 1986년대 창경궁 복원안을 내놓고 드디어는 성대한 아시안게임을 치루게 된다. 그리고 그 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하고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등 기존 문화시설 개수작업을 전개하며 급기야는 1988년 문화발전연구소를 개설하고 88올림픽을 성대히 치뤄낸다.
건축, 그 규모의 거대함
이때의 미술관 건축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선 그 규모에 있어서의 거대함을 들 수 있다. 독립기념관이 그렇고 예술의전당이 그러하며 현대미술관이 그렇다.
우리는 독립기념관이 지어질 때의 국민들이 보여준 눈물겨운 헌금의 행렬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몇몇 주요한 설비구조가 일본기술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식민구조의 청산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 굿판을 실제적으로 준비한 사람은 프로젝트에 목말라 있던 한국의 건축가들이었다.
우리 미술관 건축의 문제점
관람객들에게 가장 수월한 접근 방법을 제시해야 할 미술관 건축은 그 비대한 몸집에 걸맞는 거대한 대지를 요구하게 마련이었고 이미 발디딜 틈 없이 되어버린 도심에서는 그러한 거대욕구를 충족시켜줄 공간이 부재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의 곁에 있어야 할 미술관은 대중들의 곁을 떠나 대중부재의 미술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은 ’86년 개관한 이래 ’88년도에 약 36만명이, ’89년도에는 약 30만명이, ’90년도에는 약16만명이 관람하는 막대한 감소 상황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그 규모면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1.7배에 달하는 퐁피두센터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인 차이를 보인다(퐁피두센터는 파리시의 중심가에 있다). 퐁피두센터의 경우 건립 당시의 방문객 예상은 일일 평균 8,500∼15,000명으로 연 250만에서 450만명 정도였으나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예상의 두 배가 넘는 일일 평균 25,000명으로 연730만명이 방문한다는 것이다(이한기, 1992.1, 空間) 물론 퐁피두센터의 경우 외국관람객의 숫자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운영의 개방성과 방문자를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은 깊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천 현대미술관의 경우도 교통편의 시설의 확충이 전제된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그 선상에서, 대중에게로 다가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SITE 있는 곳이 조국
일전의 사석에서 건축가 이일훈은 ‘건축가는 SITE가 있는 곳이 조국이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고 우리미술관 건축의 지역성을 살린다는 면에서도 각별히 새겨 볼만하다고 생각된다. 반드시 조형적인 형태미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든가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풍토성을 강조했다든가 하는 특성 말고 건축 외적인 박물관의 내용면에 있어서의 특성을 다시 건축적인 해결 방법을 통함으로써 그 특성을 살려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박물관의 기획능력에 따라 그 기획을 가장 잘 살릴 수 잇는 가변적인 공간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지역과 지역적 특수성을 살린 기획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공간 연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박물관 건축에 있어서의 전시·연구·교육의 기능을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공간의 가변성을 둔다던가 작가의 행위가 직접 미술관 자체의 벽면에 새겨진다든다(메니스 비엔날레 전시장)하는 살아있는 전시공간을 창출함으로 해서 죽은 유물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고 숨쉬는 공간 연출을 통해 미술관은 대중들에게 보다 쉽고 만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죽은 유물이란 다름 아닌 흐르지 못하는 시간을 말함이고 시간이 정지한 이유는 그 시간이 대중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건축은 모름지기 놀이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미술관의 내용들이 놀이를 통해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예술은 놀이의 정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건축이 예술을 담는 그릇이라는데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건축이야말로 가장 값진 놀이가 되어야 한다. 정신없이 재미있고 시간가는 줄 몰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 건축이야말로 흘러간 시간과 흐르는 시간의 춤판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교육이니 연구니 하는 기능들이 얘기되어져야 하고 비로소 얘기되어질 수 있다.
우리의 미술관 건축은, 아니 바꿔 말해서 우리의 문화예술의 풍토는 지나친 엄숙주의로 대중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그 대중들의 유치한 놀이판에서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미술관 건축은 그 놀이의 시간속에서 어느 특정한 누구의 것도 아닌 대중의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살판나는 놀이터로의 접근을 위하여 - Renovation
도시는 포화상태이다. 도시는 빈틈이 없으며 도시의 빈곳은 몇 밤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건물로 채워진다. 따라서 도심에서의 미술관 신축이란 장소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도시공동체를 이루며 살아 온 너무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뭉개는 짓이다. 그렇다고 다시 또 부지가 마련되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대중과 떨어질 수는 없다. 놀이는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행해지고 즉흥적일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니까.
그런 도심속에 마치 푸근한 찻집처럼 자리하는 미술관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Renovation을 제의한다. Renovation이란 새로운 기능에 적합하도록 기존의 건물을 개조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급변하는 현대사회 구조의 다양하고 수시로 변하는 기능에 건축공간이 스스로를 맞춰 나가자면 항상 신축이란 방법만으로는 시간과 경제성이란 문제점이 늘 부채처럼 있어왔다. 더군다나 우리는 Life Cycle이 짧은 목조건축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유로 해서 개축에 의한 통로 전환의 방법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러한 Renovation은 기존의 도시적 문맥을 건드리지 않고서도 새로운 기능을 해결할 수 있고 대중의 광범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며 거대주의의 불식이란 점에서도 건축의, 특히 미술관 건축의 유용한 방법론이 되고 있다.
Renovation이란 의미에서는 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개조를 했든 신축을 했든지 간에 미술관 본래의 의미를 상징직으로 드러내 주는 일례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을 들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건축가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이 설계한 이 미술관은 640평 정도의 작은 대지 위에 세워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시의 역사적 중심지이고 주위에 미술관과 갤러리가 많이 산재한 문화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시민들이 즐겨 부르는 애칭인 Tortenstück(한 조각의 케랺)같은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사무실, 강당, 도서관, 강의실, 작업실, 창고, 카페테리아의 기능에 조화를 이루고, 앞서 밝혔듯이 미술관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대중과 밀접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비좁은 대지는 우리의 대부분의 미술관이 거의 법규적인 제한을 신경 안쓸 정도로 널찍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고 또 대지면적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건물의 형태를 시민들이 빗대어 애칭으로 부른다는 사실은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이 얼마나 대중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실이다.
이번엔 Renovation의 직접적인 예로, 파리 Orsay 박물관의 예를 들어보자.
Orsay박물관은 원래 철과 유리의 화려한 둥근 천정을 가진 역사였다. 지어질 당시만해도 재료면이나 공간의 구성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첨단기술로 유럽을 상징할 수 있는 건물이었으나 급변하는 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다 규모가 커진 전동열차가 등장하자 Orasy 플렛폼은 이미 그것을 수용하기에는 부적합한 건물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철도회사는 1961년 재개발 계획을 세웠고 그러나 1971년 시민들의 반대로 19세기 전용 박물관의 건립안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럽에서는 Orasy미술관 말고도 신도가 줄어 파산지경인 유럽의 많은 교회건물 등이 박물관이나 미술작업장, 심지어는 아파트, 사무실로까지 개조돼서 쓰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러한 Renovation의 좋은 경우가 있는데 비록 단순한「Gallery」의 기능이긴 하지만 한말의 박영효 고택으로서, 개화기의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되는 이 뜻깊은 가옥을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벽과 조명시설을 갖추어 훌륭한 전시공간으로 꾸민 예가 바로 경인미술관이다.
또 별채의 한옥은 전통 찻집으로 꾸며 넓은 뜰의 야외조각을 감상할 수 있어 편히 쉬며 볼 수 있는 야외 갤러리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실제로 이 경인미술관은 찻집의 기능으로 토요일, 일요일은 거의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그렇게 대중을 전시장과 친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에 범한 행랑채를 개조한 한마당 갤러리도 상당히 의의있는 공간이다. 비록 경인미술관이나 한마당 갤러리가「Museum」의 개념으로는 얘기되어지기 곤란한 점은 있지만 기실「Museum」이라는 개념 자체를 썩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시간과 시간 속에서의 즐겁고 행복한 놀이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도 Orasy 못지않은 귀중한 공간들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의 규모나 전시된 미술품의 질과 수량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미술관 관람이 목적이 아니라해도 단순히 차 한잔 마시러 와서 역사와 미술품들이 숨쉬고 있는 공간의 감(感)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그 공간을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작은 공간은 의미가 있다.
미술관은 철저하게 대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건축은 더 철저하게 놀이 정신에 위배되지 말아야 한다. 저 낮은 미술관의 논리를 위하여 건축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감성을 눈치채는데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자랄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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