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루이스 칸

Posted 2004. 5. 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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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칸(1901 -1974)


일생을 건축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열정적인 탐구활동 및 교육에 몸바쳐왔던 루이스 칸은 당시의 메마른 건축에 영감적 가치를 도입한 건축가였다. 생애의 후반기에 세인의 주목을 받는 좋은 작품을 집중적으로 남겼던 그의 건축은 자신의 건축사상을 그대로 입증하는 증거물들이었으며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건축에 대한 칸의 공헌은 근대건축의 이념중 상당부분이 실패로 인식되어 가던 시기에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밝혀주는 촛불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 칸에 대하여

건축은 시대와 사회적 산물이고, 그것을 맡는 개성의 비중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비중의 점유하는 방법이 독특한 건축가가 있다. 그 개성 없이는 시대와 사회의 어떤 핵심에 개성이 결부되고 있는 듯한 건축가로 보인다. 어떤 단점을 갖고 있더라도 사랑하여야 할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전체상을 떠올릴 때, 조금의 부끄러운 감정도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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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칸의 건축은 모두가 칸 자체라 해도 좋다. 동시에 칸만큼 60년대 이후의 미국사회의 어떤 정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칸은 완전 무결한 건축가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은혜받지 못한 고난의 건축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칸을 상기할 때, 언제나 자랑의 감정과 함께 있다. 루이스칸은 그러한 보기 드문 현대 건축가의 한 사람이다. 1901년 태어난 칸이, 현대 건축사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예일 아트 갤러리」(1951 - 53) 에 서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1951-61)부터이다. 그 곳에서 그는 서비스된 공간과 서비스하는 공간으로 구분하여, 전체와 건축구조와 공간의 관계와는 달리, 양자의 공간에 고유한 표현을 주고, 이탈리아 중세 도시의 성 짐미니아노와 같은 무리 조형을 만들어 냈다. 사고방식 위에서도, 표현상도 모더니즘과 달랐던 것이고, 공간이 현전화하는 힘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콘크리트와 벽돌이라는 기본적소재의 한정, 입방체, 감각형, 원아치 등의 순수 기하학 형태의 반복, 하늘과 대지사이의 수직한 초월성, 빛과 음영의 시학......   칸의 사색은 바로 공간의 현상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는 그것을 따라, 깊은 탐구를 하였다. 그것에 그의 개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진짜 독창은 그 사색의 끝에 「킴벨 미술관」과 같은 건축에 도달한 점이다. 이것은 강하고 또한 화려하고, 완만한 음영을 갖고, 조용한 감동을 공간에 침투시켜 간다. 구성의 힘이 배경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 없는 공간이, 단지 그 공간의 힘에 의하여 그 곳에 실존하고 있다.   루이스칸과 같은 건축가를 미국적으로 부르면, 기이한 느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편으로 언제나 세계사 위에서 가장 순수하게 선량한 이상주의가 살아 있는 사회이기도 하였다. 또한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현실적 여러 관계의 고도화나 베트남 전쟁의 패배에 의하여 아슬아슬해졌다. 개인의 실존적 근거나 문제되었던 시대에 있었다. 카운터 컬쳐가 사회의 구석구석에 드리워지려 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칸의 개성과 건축은 그와 같이 미국의 정신과 어딘가에서 결부하고 있을 것이다.

 

■ 건축적개념

칸의 건축적 개념을 분류해 보면, 건축의 본질을 다루는 추상적 개념과 보조적 개념들이 있다. 그럼 추상적인 개념들을 먼저 짚어보고 난 후 보조적인 개념을 살펴보자.

1) Realization
칸은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고, 느낌을 모든 아이디어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이디어를 노리적인 질서에 적응시키는 합리적인 사고의 가치도 배웠다. 사고와 느낌은 모두 한계를 넘어 각각 철학과 종교로 이상화될 수 잇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개인적인 경험을 초월하게 되면 문화적, 환경적인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적인 경험이 된다. 이 때 아이디어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고의 느낌이 보편적인 형태(universal form)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 그들이 융합되는 순간이 "깨달음(Reralization)"의 순간인 것이다.

2) Order
그는 질서란(Order is) - 질서가 이미 정해진 것을 함축하는 - 디자인의 모든 가능성들의 기추하고 있는 것임을 말하였다. 칸에게 있어서 질서는 자연구조의 조직을 다스리는 불변의 기본적인 법칙이었다. 자연속에는 인간의 미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부정할 수 없는 솔직함과 조화 - 즉 질서 - 가 있다고 칸은 믿었다. 건축에 있어서 구조의 질서는 건축재료들(벽돌, 콘크리트...)과 구성요소들(접합부, 지주, 개구부...)의 본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다. 칸은 건물의 재료와 구성요소들을 마치 그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물체처럼 다룸으로써 구성요소들의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 그는 형태(form)의 개념을 도입하므로서 개념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3) Form
칸에게 있어 형태란 구성요소들의 일정한 관계에 의해 하나의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되는 본질을 의미했다. 즉, 형태란 구성요소들의 어떤 질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건축의 단계중 형태 단계는 주어진 구성요소들의 배열이 특정한 형태나 크기로서 보다는 추상적으로 보여지는 단계이다. 건물의 형태는 영원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것은 변화하는 건축양식에 영향받지 않는다. 형태는 무형적이며 디자인은 완전히 유형적인 것이다. 다시말해 칸은 형태(Form)와 형상(Shape)을 구별했다. 형시은 단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느낌, 꿈, 사랑, 슬픔과 같은 잴 수 없는 것이며 구체적인 모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우리가 잴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있게 된다.
 최종 디자인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초의 형태는 주위의 조건들에 적합하도록 손질되어 진다. 이때, 질서는 그 형태의 태고 유형이 디자인 실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매역할을 한다.

4) Beginning
 칸의 본질, 기원(Beginning)에 개념은 모두 기본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의 도시와 공공건물에 관한 생각을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고, 공공건물들이 사람들의 진정한 요구에 부응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자신의 마음을 이들 건물의 기원에게로, 풍요감에게로 그리고 본질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원칙적인 힘에게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기원(Beginning)의 인스피레이션이 작용할 때, 비로소 건축가는 사람들의 요구에 보다 효과적으로 부응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의 인간에의 신념, 개인의 굳건한 신뢰는 '원점'에 근거한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건축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건축의 본질 - 사물의 시작(Beginning)을 구하는 자세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뿌리내리고 있다.

5) Served space/servant space
 칸은 건축에 질서(생명체의 형태가 가지는 본질적인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Served space와 servant space라는 공간 분류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개념은 기술의 발전이 육중한 내력벽의 사용을 불필요하게 하는 콘크리트나 강철 같은 재료를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들이 여전히 낡은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다는 칸의 깨달음(Realization)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개념에는 혁신적인 공간조직방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바로 근내건축에 대한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servant space 란 주공간(master space)를 serve한다는 의미로 계단실이나 엘리베이트실과 창고등의 수납공간, 설비공간(덕트)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Served space(사람을 위한 공간을 뜻함)도 다시 홀과 같이 주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융통성 있는 요구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 나누어 볼 수 있다. 칸은 융통성있는 실을 얻기위해 사무소에서 코어를 분리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각각의 공간에 독립형태를 부여하여 몇 개의 작은 단위를 확정시킨 후 그것들을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6) 침묵과 빛
1960년대에 칸은 그가 이전에 사고의 감정이라고 정의하였던 창조성을 이루는 기본적인 두 요소를 더욱 발전시키고 분화하였다. 칸은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표현수단을 계속해서 이분법적으로 언급해 왔었는데, 1967년 이후부터는 침묵과 빛이라는 좀 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칸은 침묵이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잴 수 었는 욕망(원초적, 빗물질적)이며 새로운 욕구에 대한 근원이고 빛은 자연이 선물한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표현수단(물질화하려는 잠재성을 지님)이라고 했으며 이들은 서로 만난다고 했다. 칸은 건축의 요소들(기둥, 아치, 돔 등)을 빛과 그림자를 주조하는 다양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설계로 형상화 된다는 관점에서 바라다 보았고, 빛과 건축의 상호작용에서 신비로운 질을 감지하였다. 비록 빛이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 의식있는 힘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이 건물과 만나게 될 때 건축이라는 것에 일종의 의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칸은 침묵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열망이 아니라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설명했다. 침묵이라는 것은 빛도 어둠도 아니며 모든 생물체의 깊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침묵은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빈공간'이며, 겉으로는 비어 있지만 생명에 대한 잠재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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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의 건축사적 위치

건축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근대건축이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와 같은 결정론적인 태도에 의한 건축을 행하였다면, 1960년대의 칸의 출현 이후로 "형태는 인간의 기본욕구에 따른다."라는 인간의 목적론적인 태도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칸의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의 시대상이 기능적 근대주의가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으로 한 시대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의 합리주의, 신고전주의 작가로 분류될 수 있으나, 단순히 어떤 사조의 작가로 분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런 분류 이전에 칸은 그의 독특한 건축적 사고와 몇몇 작품으로 인하여 근대근축에서 현대건축으로의 전이적 건축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칸의 명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두 시대에 걸쳐 있고,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격동하여 변화하는 시기에 속해 있으면서, 근대의 최후의 위치에 앞뒤의 교량역화을 한 것이다.
 근대건축을 극복한 칸 자신의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협동주의에 대비되는 개인의 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추구
·공간구성의 변화

■ 영향을 준 이론과 사람들

O.Stonorv, n. Rise, G. Howe와의 교제를 통해 칸은 근대건축과 접하게 되고, 근대건축과 접하게 되고, 근대건축을 자각시키고 새로운 구조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계적인 겆근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칸은 1950년대에 국제주의 변질의 시대적 변화를 맞게 되는데, 꼬르뷔제의 후기작품이 이러한 변화를 유도하였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이후 칸은 여러 이론들을 흡수하는데, 쿤스트, 융 등의 이론에 마음을 끌렸다. 쿤스트(Kunst)는 질서(order)에는 물리적인 질서뿐만아니라 심리적인 질서도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이 이론에서 지성과 감성을 분리시킨 것은 칸으로 하여금 창조성에 대한 그의 관점에 기초가 되었던 하나의 구분, 즉 측정할 수 있는 것(measurable)과 측정할 수 없는 것(unmeurable)을 구분하도록 자극시켰다. 집단의식에 대한 융의 이론은 프시케(각 개인의 개성을 초월한 보편적인 하나의 정신)에 관한 칸의 서술과 유사하며, 융의 archetyp;태고유형은 침묵과 빛이라는 칸의 창조성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가들의 영향외에 다른 건축가들의 영향도 칸의 칸의 건축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다. 칸의 초기 작품에는 꼬르뷔제의 브루탈리즘의 특징과 풀러의 대형 스페이스 프레임이 나타난다. 또한 칸은 라이트의 정신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으며, 라이트와 미스, 꼬르뷔제 작품경향의 중간에 서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칸이 앤 팅과 작업을 같이 하던 시기에는 이상주의의 건축에 매료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 성장배경 및 시대별 활동

루이스칸은 1901년 2월 20일,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나 1906년 그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필라델피아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거의 일생을 보냈다. 칸은 전통적인 유대사고방식의 환경에 서 자라났고 탈무드형식의 질문적인 교육방법을 배웠다. 그러한 질문적인 성격이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1920∼1940년에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건축공부를 하였는데, 그 당시 그 학교는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창설된 에꼴 데 보자르를 패턴으로 한 보자르학교였다. 1928∼1929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고전주의에 대한 것을 더 많이 배웠고, 당시 유럽 건축가의 작품, 특히 꼬르뷔제의 작품과 친숙하게 되었다. 그후 20년간 예일과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건축의 위계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0년대와 40년대까지는 그당시 분위기(국제주의)의 몇가지 인자로 말미암아 칸이 지닌 잠재성의 주요부분이 표출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의 국제주의 양식은 변질되기 시작하여, 기계적인 접근방식이 인간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이때에 칸은 마음을 열고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창조성의 여러측면들을 지각시켜 준 다른 이론가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10년간은 작품창조의 영감이 될 많은 소재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기였다. 1960년부터는 그의 철학성이 뚜렷하게 독자송을 띠었으며, 가장 활발한 활동시기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미국, 인도, 방그라데시, 이스라엘 등의 청탁으로 바쁜 와중에 교육자로서의 시간도 가졌다.

 

■ 루이스 칸의 약력

1901           2월 20일 에스토니아 시아레섬의 킹지셉에서 출생
1906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
1912-20     센트럴 고등하교와 필라델피아의 펜실베니아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
1920-24     펜실베니아 대학교 미술학과에 재학
1924          보자를 건축가협회 두 개의 2등 메달    아스 스페이스 브루크 기념상
1928-29    유럽여행
1929-30    폴 크레의 사무실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1935         건축가로 등록하여 독립활동 시작
1946-52    필라델피아 도시계획위원회의 고문건축가
1947         미국 계획가 및 건축가협회 회장
1948-57    예일대학 건축가 교수
1955-74    펜실베니아대학 건축과 교수
1961-67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의
1971         AIA 금메달 수상
1972         RIBA 금메달 수상
1979         예일대학 미술관으로 미국건축가협회 25년상 수상
1989         방글라데시 다카의 국회의사당 세어-이-방글라 나르르로 아가 칸 수상

 

■ 작품


[예일 아트 갤러리]
 예일 대학 올드 캠퍼스의 일획, 기존 건물의 증축으로서 계획되었따. 예일에 있어 최초의 현대건축이라는 점과 거리에 면한 연속성을 배려한 동측의 파사드는 정층 돌쌓기에 수평보더를 배치하였을 뿐의 막연한 표현, 한편, 북측은 중정을 하야하여 개방되어 이TEk. 내부의 천장은 보이드한 삼각추를 연속시킨 듯한 독특한 구조 시스템이 드러나 있다. 루이스칸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 유틸리티 코어를 가진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는 3동의 건설되고, 나중에 2동이 증축되었다. 세로 동선이나 설비배관을 한 서비스코어가 연구 스페이스로부터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그 구성은 수직성을 강조하는 벽돌의 코어로서 외관에도 솔히 표현되고 있다. 이작품으로 루이스 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 

유틸리티 코어를 가진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는 3동의 건설되고, 나중에 2동이 증축되었다. 세로 동선이나 설비배관을 한 서비스코어가 연구 스페이스로부터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그 구성은 수직성을 강조하는 벽돌의 코어로서 외관에도 솔히 표현되고 있다. 이작품으로 루이스 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
킴벨 미술관 1966-72]

건축에 초월성이 생기는 것은 어떠한 조건에 의한 것일까. 우리는 페허가 된 고대 유적으로부터 종종 초월적 공간을 채험한다. 그것들이 현재로부터 먼거리에 있는 것이 기본 조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건축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본래 이유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그것을 요구하고, 또한 신비의 힘으로밖에 풀수 없을 것같은 것을 사실체험한다.「킴벨미술관」은 그러한 희한한 현대 건축의 하나이다....
기단상의 지상층 위에 30m×6.5m의 볼트를 길이 방향으로 3열로 잇고, 박공측은 6개의 사이클로이드 곡선이 이어져 있다. 서측은 중양으로 끌려 들어간 정면 입구를 전면유리, 양 옆의 포치로 하여, 공원에 개방적으로 연속시키고 있는 이외도, 외관은 전체적으로 벽으로 막혀 있다. 한 순간 이집드의 록소르, 신왕조 람세스2세 신전이 창고들인가 하고 오인되는 공형이 수평으로 달린다. 내부의 인상은 그것과는 대비적으로 은은한 밝기에 충만해 있다. 볼트 중앙의 톱라이트는 그 곡면을 매끄럽게 부상시키고, 주광은 점점이 늘어서 잇는 중정으로부터 들어온다. 볼트와 볼트사이의 2.5m 폭의 낮은 공간에는 설비나 계단실이 있고, 볼트 공간을 구절한다든지 펼친다든지 하고 있는데, 마스터 스페이스와 서반트 스페이스와 같은 강한 구분은 아니다. 트인 볼트의 오더와 같은 기둥의 취급이나, 양 사이드의 볼트 하단을 따라 궁형 채광 등과 같이 작고 날카로운 리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출콘크리트, 트래버틴, 목재 패널을 주로한 소재의 한정, 억누른 기미의 치수, 그리고 대개 평활한 표면등에 의하여 종래의 칸의 특징인, 명괘한 공간의 구분, 강한 형태의 힘과 음영의 대비 등이 억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화적 중용성이 이 건축의 비밀인 것일까. 오히려 그러한 개개의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 공간의 사건으로서의 힘인 듯이도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정적이나 친밀감 깊은 밝음과 같은 극히 친근한 초월성인 것이다.   캠벨미술관은 한국의 고건축처럼 폐쇄성과 단순성을 보이나 입구로부터의 체험의 깊이가 더 함에 따라 개방성과 다양성을 나타낸다. sevant space er served space가 음·양의 상징성을 4차원적으로 번영, 인간적 스케일, 캠벨미술관은 일련의 둥근볼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볼트는 옥외중정이 띄엄띄엄 배치된 길다란 내부 갤러리를 형성하고 있다. 내부에서 외부공간으로의 흐름은 초점을 바깥쪽으로 확장시키며, 그에 따라 관람객들은 일반적인 박물관에서 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끝없는 듯한 복도로 인하여 지루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한다.



일생을 건축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열정적인 탐구활동 및 교육에 몸바쳐왔던 루이스 칸은 당시의 메마른 건축에 영감적 가치를 도입한 건축가였다. 생애의 후반기에 세인의 주목을 받는 좋은 작품을 집중적으로 남겼던 그의 건축은 자신의 건축사상을 그대로 입증하는 증거물들이었으며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건축에 대한 칸의 공헌은 근대건축의 이념중 상당부분이 실패로 인식되어 가던 시기에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밝혀주는 촛불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 칸에 대하여

건축은 시대와 사회적 산물이고, 그것을 맡는 개성의 비중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비중의 점유하는 방법이 독특한 건축가가 있다. 그 개성 없이는 시대와 사회의 어떤 핵심에 개성이 결부되고 있는 듯한 건축가로 보인다. 어떤 단점을 갖고 있더라도 사랑하여야 할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전체상을 떠올릴 때, 조금의 부끄러운 감정도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이스 칸의 건축은 모두가 칸 자체라 해도 좋다. 동시에 칸만큼 60년대 이후의 미국사회의 어떤 정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칸은 완전 무결한 건축가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은혜받지 못한 고난의 건축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칸을 상기할 때, 언제나 자랑의 감정과 함께 있다. 루이스칸은 그러한 보기 드문 현대 건축가의 한 사람이다. 1901년 태어난 칸이, 현대 건축사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예일 아트 갤러리」(1951 - 53) 에 서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1951-61)부터이다. 그 곳에서 그는 서비스된 공간과 서비스하는 공간으로 구분하여, 전체와 건축구조와 공간의 관계와는 달리, 양자의 공간에 고유한 표현을 주고, 이탈리아 중세 도시의 성 짐미니아노와 같은 무리 조형을 만들어 냈다. 사고방식 위에서도, 표현상도 모더니즘과 달랐던 것이고, 공간이 현전화하는 힘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콘크리트와 벽돌이라는 기본적소재의 한정, 입방체, 감각형, 원아치 등의 순수 기하학 형태의 반복, 하늘과 대지사이의 수직한 초월성, 빛과 음영의 시학......   칸의 사색은 바로 공간의 현상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는 그것을 따라, 깊은 탐구를 하였다. 그것에 그의 개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진짜 독창은 그 사색의 끝에 「킴벨 미술관」과 같은 건축에 도달한 점이다. 이것은 강하고 또한 화려하고, 완만한 음영을 갖고, 조용한 감동을 공간에 침투시켜 간다. 구성의 힘이 배경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 없는 공간이, 단지 그 공간의 힘에 의하여 그 곳에 실존하고 있다.   루이스칸과 같은 건축가를 미국적으로 부르면, 기이한 느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편으로 언제나 세계사 위에서 가장 순수하게 선량한 이상주의가 살아 있는 사회이기도 하였다. 또한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현실적 여러 관계의 고도화나 베트남 전쟁의 패배에 의하여 아슬아슬해졌다. 개인의 실존적 근거나 문제되었던 시대에 있었다. 카운터 컬쳐가 사회의 구석구석에 드리워지려 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칸의 개성과 건축은 그와 같이 미국의 정신과 어딘가에서 결부하고 있을 것이다.

 

■ 건축적개념

칸의 건축적 개념을 분류해 보면, 건축의 본질을 다루는 추상적 개념과 보조적 개념들이 있다. 그럼 추상적인 개념들을 먼저 짚어보고 난 후 보조적인 개념을 살펴보자.

1) Realization
칸은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고, 느낌을 모든 아이디어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이디어를 노리적인 질서에 적응시키는 합리적인 사고의 가치도 배웠다. 사고와 느낌은 모두 한계를 넘어 각각 철학과 종교로 이상화될 수 잇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개인적인 경험을 초월하게 되면 문화적, 환경적인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적인 경험이 된다. 이 때 아이디어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고의 느낌이 보편적인 형태(universal form)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 그들이 융합되는 순간이 "깨달음(Reralization)"의 순간인 것이다.

2) Order
그는 질서란(Order is) - 질서가 이미 정해진 것을 함축하는 - 디자인의 모든 가능성들의 기추하고 있는 것임을 말하였다. 칸에게 있어서 질서는 자연구조의 조직을 다스리는 불변의 기본적인 법칙이었다. 자연속에는 인간의 미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부정할 수 없는 솔직함과 조화 - 즉 질서 - 가 있다고 칸은 믿었다. 건축에 있어서 구조의 질서는 건축재료들(벽돌, 콘크리트...)과 구성요소들(접합부, 지주, 개구부...)의 본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다. 칸은 건물의 재료와 구성요소들을 마치 그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물체처럼 다룸으로써 구성요소들의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 그는 형태(form)의 개념을 도입하므로서 개념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3) Form
칸에게 있어 형태란 구성요소들의 일정한 관계에 의해 하나의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되는 본질을 의미했다. 즉, 형태란 구성요소들의 어떤 질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건축의 단계중 형태 단계는 주어진 구성요소들의 배열이 특정한 형태나 크기로서 보다는 추상적으로 보여지는 단계이다. 건물의 형태는 영원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것은 변화하는 건축양식에 영향받지 않는다. 형태는 무형적이며 디자인은 완전히 유형적인 것이다. 다시말해 칸은 형태(Form)와 형상(Shape)을 구별했다. 형시은 단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느낌, 꿈, 사랑, 슬픔과 같은 잴 수 없는 것이며 구체적인 모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우리가 잴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있게 된다.
 최종 디자인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초의 형태는 주위의 조건들에 적합하도록 손질되어 진다. 이때, 질서는 그 형태의 태고 유형이 디자인 실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매역할을 한다.

4) Beginning
 칸의 본질, 기원(Beginning)에 개념은 모두 기본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의 도시와 공공건물에 관한 생각을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고, 공공건물들이 사람들의 진정한 요구에 부응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자신의 마음을 이들 건물의 기원에게로, 풍요감에게로 그리고 본질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원칙적인 힘에게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기원(Beginning)의 인스피레이션이 작용할 때, 비로소 건축가는 사람들의 요구에 보다 효과적으로 부응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의 인간에의 신념, 개인의 굳건한 신뢰는 '원점'에 근거한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건축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건축의 본질 - 사물의 시작(Beginning)을 구하는 자세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뿌리내리고 있다.

5) Served space/servant space
 칸은 건축에 질서(생명체의 형태가 가지는 본질적인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Served space와 servant space라는 공간 분류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개념은 기술의 발전이 육중한 내력벽의 사용을 불필요하게 하는 콘크리트나 강철 같은 재료를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들이 여전히 낡은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다는 칸의 깨달음(Realization)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개념에는 혁신적인 공간조직방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바로 근내건축에 대한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servant space 란 주공간(master space)를 serve한다는 의미로 계단실이나 엘리베이트실과 창고등의 수납공간, 설비공간(덕트)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Served space(사람을 위한 공간을 뜻함)도 다시 홀과 같이 주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융통성 있는 요구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 나누어 볼 수 있다. 칸은 융통성있는 실을 얻기위해 사무소에서 코어를 분리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각각의 공간에 독립형태를 부여하여 몇 개의 작은 단위를 확정시킨 후 그것들을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6) 침묵과 빛
1960년대에 칸은 그가 이전에 사고의 감정이라고 정의하였던 창조성을 이루는 기본적인 두 요소를 더욱 발전시키고 분화하였다. 칸은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표현수단을 계속해서 이분법적으로 언급해 왔었는데, 1967년 이후부터는 침묵과 빛이라는 좀 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칸은 침묵이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잴 수 었는 욕망(원초적, 빗물질적)이며 새로운 욕구에 대한 근원이고 빛은 자연이 선물한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표현수단(물질화하려는 잠재성을 지님)이라고 했으며 이들은 서로 만난다고 했다. 칸은 건축의 요소들(기둥, 아치, 돔 등)을 빛과 그림자를 주조하는 다양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설계로 형상화 된다는 관점에서 바라다 보았고, 빛과 건축의 상호작용에서 신비로운 질을 감지하였다. 비록 빛이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 의식있는 힘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이 건물과 만나게 될 때 건축이라는 것에 일종의 의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칸은 침묵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열망이 아니라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설명했다. 침묵이라는 것은 빛도 어둠도 아니며 모든 생물체의 깊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침묵은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빈공간'이며, 겉으로는 비어 있지만 생명에 대한 잠재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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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의 건축사적 위치

건축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근대건축이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와 같은 결정론적인 태도에 의한 건축을 행하였다면, 1960년대의 칸의 출현 이후로 "형태는 인간의 기본욕구에 따른다."라는 인간의 목적론적인 태도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칸의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의 시대상이 기능적 근대주의가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으로 한 시대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의 합리주의, 신고전주의 작가로 분류될 수 있으나, 단순히 어떤 사조의 작가로 분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런 분류 이전에 칸은 그의 독특한 건축적 사고와 몇몇 작품으로 인하여 근대근축에서 현대건축으로의 전이적 건축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칸의 명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두 시대에 걸쳐 있고,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격동하여 변화하는 시기에 속해 있으면서, 근대의 최후의 위치에 앞뒤의 교량역화을 한 것이다.
 근대건축을 극복한 칸 자신의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협동주의에 대비되는 개인의 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추구
·공간구성의 변화

■ 영향을 준 이론과 사람들

O.Stonorv, n. Rise, G. Howe와의 교제를 통해 칸은 근대건축과 접하게 되고, 근대건축과 접하게 되고, 근대건축을 자각시키고 새로운 구조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계적인 겆근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칸은 1950년대에 국제주의 변질의 시대적 변화를 맞게 되는데, 꼬르뷔제의 후기작품이 이러한 변화를 유도하였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이후 칸은 여러 이론들을 흡수하는데, 쿤스트, 융 등의 이론에 마음을 끌렸다. 쿤스트(Kunst)는 질서(order)에는 물리적인 질서뿐만아니라 심리적인 질서도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이 이론에서 지성과 감성을 분리시킨 것은 칸으로 하여금 창조성에 대한 그의 관점에 기초가 되었던 하나의 구분, 즉 측정할 수 있는 것(measurable)과 측정할 수 없는 것(unmeurable)을 구분하도록 자극시켰다. 집단의식에 대한 융의 이론은 프시케(각 개인의 개성을 초월한 보편적인 하나의 정신)에 관한 칸의 서술과 유사하며, 융의 archetyp;태고유형은 침묵과 빛이라는 칸의 창조성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가들의 영향외에 다른 건축가들의 영향도 칸의 칸의 건축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다. 칸의 초기 작품에는 꼬르뷔제의 브루탈리즘의 특징과 풀러의 대형 스페이스 프레임이 나타난다. 또한 칸은 라이트의 정신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으며, 라이트와 미스, 꼬르뷔제 작품경향의 중간에 서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칸이 앤 팅과 작업을 같이 하던 시기에는 이상주의의 건축에 매료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 성장배경 및 시대별 활동

루이스칸은 1901년 2월 20일,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나 1906년 그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필라델피아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거의 일생을 보냈다. 칸은 전통적인 유대사고방식의 환경에 서 자라났고 탈무드형식의 질문적인 교육방법을 배웠다. 그러한 질문적인 성격이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1920∼1940년에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건축공부를 하였는데, 그 당시 그 학교는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창설된 에꼴 데 보자르를 패턴으로 한 보자르학교였다. 1928∼1929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고전주의에 대한 것을 더 많이 배웠고, 당시 유럽 건축가의 작품, 특히 꼬르뷔제의 작품과 친숙하게 되었다. 그후 20년간 예일과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건축의 위계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0년대와 40년대까지는 그당시 분위기(국제주의)의 몇가지 인자로 말미암아 칸이 지닌 잠재성의 주요부분이 표출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의 국제주의 양식은 변질되기 시작하여, 기계적인 접근방식이 인간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이때에 칸은 마음을 열고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창조성의 여러측면들을 지각시켜 준 다른 이론가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10년간은 작품창조의 영감이 될 많은 소재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기였다. 1960년부터는 그의 철학성이 뚜렷하게 독자송을 띠었으며, 가장 활발한 활동시기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미국, 인도, 방그라데시, 이스라엘 등의 청탁으로 바쁜 와중에 교육자로서의 시간도 가졌다.

 

■ 루이스 칸의 약력

1901           2월 20일 에스토니아 시아레섬의 킹지셉에서 출생
1906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
1912-20     센트럴 고등하교와 필라델피아의 펜실베니아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
1920-24     펜실베니아 대학교 미술학과에 재학
1924          보자를 건축가협회 두 개의 2등 메달    아스 스페이스 브루크 기념상
1928-29    유럽여행
1929-30    폴 크레의 사무실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1935         건축가로 등록하여 독립활동 시작
1946-52    필라델피아 도시계획위원회의 고문건축가
1947         미국 계획가 및 건축가협회 회장
1948-57    예일대학 건축가 교수
1955-74    펜실베니아대학 건축과 교수
1961-67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의
1971         AIA 금메달 수상
1972         RIBA 금메달 수상
1979         예일대학 미술관으로 미국건축가협회 25년상 수상
1989         방글라데시 다카의 국회의사당 세어-이-방글라 나르르로 아가 칸 수상

 

■ 작품


[예일 아트 갤러리]
 예일 대학 올드 캠퍼스의 일획, 기존 건물의 증축으로서 계획되었따. 예일에 있어 최초의 현대건축이라는 점과 거리에 면한 연속성을 배려한 동측의 파사드는 정층 돌쌓기에 수평보더를 배치하였을 뿐의 막연한 표현, 한편, 북측은 중정을 하야하여 개방되어 이TEk. 내부의 천장은 보이드한 삼각추를 연속시킨 듯한 독특한 구조 시스템이 드러나 있다. 루이스칸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 유틸리티 코어를 가진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는 3동의 건설되고, 나중에 2동이 증축되었다. 세로 동선이나 설비배관을 한 서비스코어가 연구 스페이스로부터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그 구성은 수직성을 강조하는 벽돌의 코어로서 외관에도 솔히 표현되고 있다. 이작품으로 루이스 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 연구소] 

유틸리티 코어를 가진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는 3동의 건설되고, 나중에 2동이 증축되었다. 세로 동선이나 설비배관을 한 서비스코어가 연구 스페이스로부터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그 구성은 수직성을 강조하는 벽돌의 코어로서 외관에도 솔히 표현되고 있다. 이작품으로 루이스 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
킴벨 미술관 1966-72]

건축에 초월성이 생기는 것은 어떠한 조건에 의한 것일까. 우리는 페허가 된 고대 유적으로부터 종종 초월적 공간을 채험한다. 그것들이 현재로부터 먼거리에 있는 것이 기본 조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건축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본래 이유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그것을 요구하고, 또한 신비의 힘으로밖에 풀수 없을 것같은 것을 사실체험한다.「킴벨미술관」은 그러한 희한한 현대 건축의 하나이다....
기단상의 지상층 위에 30m×6.5m의 볼트를 길이 방향으로 3열로 잇고, 박공측은 6개의 사이클로이드 곡선이 이어져 있다. 서측은 중양으로 끌려 들어간 정면 입구를 전면유리, 양 옆의 포치로 하여, 공원에 개방적으로 연속시키고 있는 이외도, 외관은 전체적으로 벽으로 막혀 있다. 한 순간 이집드의 록소르, 신왕조 람세스2세 신전이 창고들인가 하고 오인되는 공형이 수평으로 달린다. 내부의 인상은 그것과는 대비적으로 은은한 밝기에 충만해 있다. 볼트 중앙의 톱라이트는 그 곡면을 매끄럽게 부상시키고, 주광은 점점이 늘어서 잇는 중정으로부터 들어온다. 볼트와 볼트사이의 2.5m 폭의 낮은 공간에는 설비나 계단실이 있고, 볼트 공간을 구절한다든지 펼친다든지 하고 있는데, 마스터 스페이스와 서반트 스페이스와 같은 강한 구분은 아니다. 트인 볼트의 오더와 같은 기둥의 취급이나, 양 사이드의 볼트 하단을 따라 궁형 채광 등과 같이 작고 날카로운 리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출콘크리트, 트래버틴, 목재 패널을 주로한 소재의 한정, 억누른 기미의 치수, 그리고 대개 평활한 표면등에 의하여 종래의 칸의 특징인, 명괘한 공간의 구분, 강한 형태의 힘과 음영의 대비 등이 억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화적 중용성이 이 건축의 비밀인 것일까. 오히려 그러한 개개의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 공간의 사건으로서의 힘인 듯이도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정적이나 친밀감 깊은 밝음과 같은 극히 친근한 초월성인 것이다.   캠벨미술관은 한국의 고건축처럼 폐쇄성과 단순성을 보이나 입구로부터의 체험의 깊이가 더 함에 따라 개방성과 다양성을 나타낸다. sevant space er served space가 음·양의 상징성을 4차원적으로 번영, 인간적 스케일, 캠벨미술관은 일련의 둥근볼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볼트는 옥외중정이 띄엄띄엄 배치된 길다란 내부 갤러리를 형성하고 있다. 내부에서 외부공간으로의 흐름은 초점을 바깥쪽으로 확장시키며, 그에 따라 관람객들은 일반적인 박물관에서 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끝없는 듯한 복도로 인하여 지루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한다.

 

 

출처:http://www.interiall.com/  ㅡ인터넷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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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르 꼬르뷔제

Posted 2004. 5. 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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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리즘(Purism)의 근대 화가이기도 했던 건축가 르 꼬르뷔제는 본명이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Charles Edouard Jeanneret)"로 1887년 10월 6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 라쇼드퐁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꼬르뷔제는 스위스의 미술학교에서 "오직 자연만이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 자연만이 진실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화가이자 그의 스승인 "샤를 레플라테니에"로부터 장식은 단지 자의적이며 절충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합리성에 근거한 것임을 익힐수 있었다.

20대 전반을 주로 유럽과 중동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도시건축을 연구하였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로, 잡지『에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와 많은 저서, 도시계획과 실제 작품을 통해서 마침내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의 기수가 되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하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선한 기계미학이 이 시기의 모든 제작에 일관되어 있고, 이와 같은 건축사상은『건축을 향하여』『도시계획(Urbanisme)』등, 이 시기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같은 사상이 구체적인 스케일로 나타난 것으로『현대도시(1922)』와『플랑 부아쟁(1995)』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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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약력
1887년 10월 6일 스위스 라쇼데퐁스에서 출생.
1914년 도미노 시스템(Domino System)을 발표.
1917년 순수주의 운동전개 순수파 창시.
1922년 근대건축 5원칙을 확립.
1925년 『건축을 향하여』『도시론』 등의 저술 및 『인구 300만의 도시계획안』
1927년 가르슈의 저택(Garches), 제네바의 국제연맹회관 계획 (Palace of the League of Nations)
1928년 CIAM(근대건축 국제회의)의 창단 멤버.
1931년 사보이 별장(Villa Savoye)
1932년 파리대학의 스위스 학생회관(Pavilion Suisse a la Cte Universitaire)
1945년 건설자 모임(ASCORAL)을 조직, 세 개의 "인간시설"'제창.(농경단위,방사집중도시,선형(線型)공업도시)
1950년 샨디갈(Chandigarh)의 관청계획
1952년 위니테 다비다시농
1954년 롱샹의 교회당(The pilgimage church of Notre Dame-du-Haut; Ronchamp)
1965년 프랑스 로크브룬네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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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티-les polotis의 사용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 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에게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뼈대와 벽의 기능적인 독립-La Fenetre en Longeu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 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으로 1932년 알지에 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 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수 있게 처리하였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자유로운 건물 정면-Le Facade Livre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 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옥상 정원-Le Toit-Terrasse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 위험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에 의해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으며 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롱샹 교회(1955)는 콘크리트의 자유로운 조형 가능성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내부에서 떨어지는 빛은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자연과 조화된 조형성과 내부공간의 공간감, 빛의 효과적인 수용에 의한 신비함은 건축의 비물질적인 가치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건축물에는 전기조명이 전혀 없이 자연채광에만 의존하고있는 것 또한 주목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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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아주택(1929)은 사보아가를 위해 디자인된 것도, 이 특징부지를 위해 설계된 것도 아니다. 그 중심사상은 피로티, 입방체, 옥상정원이다. 이 건물이 1959년에 철거될 운명에 처해졌을 때 드골정부에게 사보아주택의 보존을 요구하는 세계각지 건축가의 편지, 전보, 결의서 등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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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르꼬르뷔제의 몇 가지의 초기 주택작품이나, 도시에 대한 제안의 실패가 여러 가지 논리적으로 비판되기에 이르렀다. 「도미노 하우스」의 혁명적 제안의 독창성이나, 「유니테 다비타시옹 마르세이유」에 대해서는 그 가치의 칭찬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롱샹의 교회」가 20세게 건축의 금자탑으로서, 언제까지나 그 존재 의의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롱샹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조형을 칭찬하는 사람은 많이 있었어도, 현대 건축의 명작으로서의 특질을 또한 현대 건축사의 선구적인 전환점으로서의 의의를 저하는 사람은 적다.
 
 마리아 성당은 도미니코 파의 순례에서 중요한 영적인 장으로서 예로부터 준재하고, 2번의 세계대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르꼬르뷔제는 한편으로, 지역 주민의 순례의 민속을 부활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표현과 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축을 창조하는 일을 동시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언어로 말하는 「장소성」의 회복, 「기억」의 전승이라는 작업이다 (그런데 르 꼬르뷔제는 마리아 신앙과 인연이 없는 프로테스탄트, 망명 유그노의 후예라는 내면적 곤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J.스털링은 1956년 3월의 『The Architectural Review』에서 이 건축을 논평하고, 칭찬과 함께 약간의 미혹을 보이고 있다.
도르멘과 같이 자연적 요소와 비자연적구성이 돌연히 해후하고 또한 결코 모뉴먼탈하지는 않고, 오히려 지면과 반대로 만곡한 셸이 애매모호한 마무리의 벽면 보조를 빌어, 무중력으로 뜬 인상을 주고 있음을 칭찬함과 동시에, 극히 정교하고 치말하게 쳐진 프리캐스트나 주철이나 강 등의 공업소재와 옛 교회의 석재나 낡은 기와조각의 조적조를 자립시키기 위하여 만곡한 평면으로 쌓아 회반죽으로 마무리한다는 소박한 기술이 공존하고 있는데 감탄한다.
 
롱샹교회의 5가지 특징
 
1. 형태의 방향성: 진입방향강조 지붕선
2. 포용적인 공간 : 오목한 경사면이 예배실의 벽면을 향함.
3. 대비적인 성격
4. 구조체계 : 삼각형의 수직구조체계에 의해 구성된 육뭗한 매스가 지붕을 받침.
5. 채광 : 빛은 예배실을 신성한 장소로 내부의 형태와 공간을 변화시킴

 


영향

 

1. 사조에 미친 영향 -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의 성격을 갖는 근대건축에 큰 영향을 끼침
                              - 철근콘크리트의 재료사용은 수 년 후 영국에서 이런 접근 방법을 출발점으로 한 브루탈리즘이라 부르는
                                 건축 경향이 일어남

2. 작품에 미친 영향-장누벨의 볼륨작업(아랍문화원), 도미니크페로의 유리상자, 앙리시리아니의 두꺼운 파사드(생드나 집합주거)

3. 르 꼬르뷔제의 영향의 3단계
    1) 르 꼬르뷔제의 건축 및 부르타리즘의 발달
    2) 르 꼬르뷔제의 건축 및 디자인에 대한 그의 인간적 접근 방식의 영향
    3) 르 꼬르뷔제의 건축 및 주거와 도시설계에 관한 그의 영향

 

 

 

 

 

출처:http://www.interiall.com/  ㅡ인터넷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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