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
Posted 2004. 5. 7. 07:28-월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 1919 )로서 20년대 이후 새로운 조형 및 건축교육의 중심지로 데소 바우하우스를 육성하여 새로운 조형활동을 건축 혹은 건축공간을 통하여 근대공업과 근대생활에 연결하고자 하였다. 기능충족 , 합리적 생산방식에 근거한 건축의 이상을 주택에 발정시켜 주택의 모든 부재를 규격화하고 표준화하여 공장생산하려고 주택공업을 제창하였다.
그의 저서 국제건축에서 「건축은 항상 민족적이며 또 개인적이다. 그러나 세개의 동심원 ― 개인과 민족과 인류 ― 가운데서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원이 다른 두개의 원을 내포한다. 」라고 말하여 건축은 필연적으로 재료 , 구조기술 , 기능의 조건이 공통된 근대사회의 국제적으로 공통된 표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체에 대한 본질탐구를 통하여 모든 근대적 생산방법과 구조기술과 재료를 결정적으로 고려함으로써 관습적이 아닌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
* 파그스 공장 ( 1911 )
유리와 철의 평탄한 면이 지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리와 철의 벽체가 그 모서리에 기둥을 두지 않고 직접 교차되고 있다. 벽의 역할은 우수와 추위와 소음을 배제하기 위하여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의 역할로 한정되어 버렸다. 건축적 수단과 구조적 수단을 결합하여 한 통일된 표현이 이루어졌다.
* 하버드 대학원 교사 ( 1949 )
* 바우하우스 교사 ( 1926 )
여러 개의 입방체를 대지위에 떠 돌게 하였다. 유리는 비물질화를 위하여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작동은 다리로 연결되어 유동성을 나타내고 항호 침투된 공간은 유기적으로 결속되고 있다.
공장 블럭의 유리벽은 완전한 형태로 실현된 커튼 월로 밝은 채광외에 폐쇄되지 않고 외부공간으로 무제한 확대되는 새로운 공간의 성질을 주었다.
* 튜리뷴 사옥 계획안 / * 맥코믹 빌딩/ * 바그다드 대학
『 상세히』
1883년 베를린에서 출생하여 1969년 메사추세스주 보스턴에서 작고.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스승이자 건축가인 그는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했다.
뮌헨과 베를린의 기술 전문학교에서 건축에 관한 수업을 받았다. 1907년 피터 베에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갔다. 이 사무소에서 활동하던 많은 젊은 건축가들의 대부분이 명성을 떨친 건축가로 성장하는데,이 중에는 미스와 르 꼬르뷔지에도 포함된다. 베에렌스의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은지 3년 후인 1910년, 산업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분야는 실내 장식과 벽지 , 대량 생산을 위한 가구모델 , 차체 , 디젤 기관차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첫번째 그의 중요 건물은 라인 강 근처의 알페트에 위치한 파구스 공장인데 1911년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디자인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철과 유리로 된 구조물로 한 단계 앞으로 돌출된 형태이다.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바닥이 철골구조로 지지되어 있으며 벽은 유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구조적인 특징은 모서리 부분의 수직 지지물의 부재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1914년 쾰른에서 개최되었던 독일 공작연맹 전시회에 그로피우스와 마이어가 함께 디자인하여 선보인 관리 사무소 건물은 근대 건축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건물이다. 계단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탑은 수 많은 근대 건축들 특히 백화점이 중요 형상이 되는 건축적 모티프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티프는 멘델스존에 의해 더욱 세련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1914-18년은 독일 군대에서 군복무를 하였던 시기로 그로피우스의 공백 기간에 해당한다. 1915년 삭스 -바이마르의 대공으로부터 바이마르 소재의 ‘작센 대공 공예학교’와 ‘작센 대공건축 전문학교’의 교장이었던 앙리 반데 벨데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그는 이 학교를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란 이름에 통합시켰다. 이는 디자인과 수공예의 통합과 기예와 기술의 통합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919-1925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와 1925-28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관료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난 건축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재직시, 1926년에 완성을 보게되는 데사우의 학교 건물을 직접 디자인하였다. 강의실용 건물과 작업용 건물, 학생 거주용 건물이 함께 모여 있는 하나의 복합 건물과 공동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과 이 두 건물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모양의 건물은 관리실과 클럽실 , 그로피우스 자신의 개인 아틀리에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실이 있는 건물의 날개 부분은 보강 콘크리트 바닥-슬래브로 되어 있으며 버섯 모양의 기둥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지지대들이 유리로 된 외벽의 안쪽으로 물러나 있어, 전체가 하나의 유리벽을 형성하여 1층에서 3층까지 죽 연결된 파사드를 만들어 준다. 이는 아마도 산업 건물에 유리벽을 사용한 첫 경우가 될 것이다. 이후 유럽과 미주 대륙으로 이와 유사한 공법들이 널리 퍼져 갔다.
마이어의 협조 아래 디자인된 제나에 위치한 시립 극장의 개축안 (1923) 과 에를란겐 소재의 국제 철학 연구학회 건물 (1924), 베를린 극장의 프로듀서인 E.피스카토르의 협조아래 1927년에 디자인된 종합극장 등이 1920년대의 극장 건물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반원형의 오케스트라 극장을 갖춘 그리이스식 극장에서 원형 경기장 ( arena ) 을 갖춘 곡마장, 근대적인 프로시니움식 아치 유형에 이르기까지 행해질 극의 유형에 적용될 수 있는 극장을 디자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좌석의 열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른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부분별로 회전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모델이 1930년 파리 전시회에 전시되기는 했지만 실제 지어지지는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이자 산업 디자이너일 뿐만 아니라 , 사람들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그 결과를 근간으로 짓고자 한 사회학자이기도 했다.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맡고 있던 후기에 그는 도시의 성격을 보존하면서 가장 좋은 생활 조건을 얻기 위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였다. 그는 도시거주자들에게 같은 밀도를 가지고 비교할 때, 가능한 한 더 많은 일조와 많은 잔디와 나무들로 이루어진 개방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약 10충 높이에 해당하는 커다란 슬래브형 아파트 단지를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지위에 조성하였다. 단지 사이는 정원을 넓게 만들고 단지 양 끝은 개방 공간으로 구성하여 통풍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였다. 전체적인 밀도가 위와 같은 조건하에서 좀 더 건물의 높이를 들어올려 지면의 이용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게 하였고, 자연관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계획안도 내놓았다.
그로피우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칼스루에 소재이 뎀메르스토크 주거지 계획(1927-8)에 부분적으로 실현시켰다. 또 다른 하나의 야심작은 베를린 소재의 커다란 규모의 시멘트 시 주택단지 (1929-30 )이다.
1933년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쥐게 되어 자유롭고 근대적인 성향의 건축가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이유로 1934년 그로피우스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캠브리지주의 임핑톤 집단 대학 ( 1936 )을 디자인했으며 이것은 영국 건축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초 하버드 대학교로보터 교수로 와 줄 것을 제의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다음 해, 하버드 대학교 건축과 장이 되었으며 일년 후 메사추세스 주의 린콜론에 자신의 집을 짓고 이 집은 1926년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재직 중 그가 디자인한 것으로 고전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후 미국의 여러 건축가들과 함께 주거 건축 분야에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해에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자 교사였던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함께 내 놓은 작품은 브로이어의 집을 포함한 몇몇 주택들과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 출품되었던 펜실베니아관, 한 알루미늄 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한 피츠버그 근교 , 뉴켄싱턴 소재의 주거 단지 계획안(1941) 등이다. 이 주거단지 내의 건물들을 언덕의 지형선을 따라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에 이르는 길은 구불구불하게 나 있다. 1941년 브로이어의 죽음에 따라 그와의 파트너 관계는 여기서 끝을 맺게 되었다.
1932년 독일에 있을 때 이미 실험하기 시작한 대량 생산 주거를 위한 표준화된 건설 요소들을 1943-5 년 다시 이곳에서 실험하였다. 앞서의 실험은 동판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후의 실험은 일정한 모듈을 바탕으로 한 가로세로의 크기가 모두 40inch 인 나무널을 이용한 것이었다. 콘라드 왁스만의 협조 아래 뉴욕의 롱 아일랜드에 실험적 주택을 지었으며, 몇번의 실험을 통한 경험 축적 후 상당수의 주택을 캘리포니아에 남겼다.
1945년 ‘건축가 협력체’라는 이름 하에 8명이 팀을 이룬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과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그는 안내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커다란 그룹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가 협력 작업의 가치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러한 협력 작업이 근대 건물을 디자인하는 데는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느껴 왔던 것이다. 이 팀의 작품으로 케임브리지 소재 하버드 대학교의 대학원 센터를 들 수 있는데, 이 건물은 7개의 기숙사 블록이 한 그룹을 형성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그룹들은 사교 센터를 중심으로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1957-1967년 사이의 그의 마지막 활동기는 서부 베를린에서 보내게 된다. 1957년 한 지구에 있었던 국제 건축 전시회를 위한 일환으로서 10층 짜리 멋진 아파트를 선보였다. 이 건물의 남쪽을 바라보는 파사드는 요철형태의 발코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층은 개방되어 있고 자유롭게 서 있는 각주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late modern 의 특징을 많이 느끼게 해준다. 1960년대에 브리츠-북코브-루도란 이름의 뉴타운이 그로피우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전적으로 지어졌다. 원래 다름슈타트에 지으려고 계획한 것인데, A.크비아노빅에 의해 새로운 대지로 옮겨 지어졌다.
그로피우스의 건물들이 근대적인 재료들 ( 철, 콘크리트 , 유리 )을 잘 이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보다 더 훌륭한 점은 건물의 외벽 전체를 유리막으로 이용하여 일광을 최대한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건축적으로 볼 때, 그의 작품은 항상 고전적인 잔류물과 비례의 탁월한 이용 등이 그 특징으로 지적된다. 이런한 예로 가장 적합한 것으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 있는 직원을 위한 주택을 들 수 있다. 그는 건축가로서는 물론 스승으로서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표준화와 조립식의 정교한 적용문제에 대한 위대한 신봉자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의 건물이 전체적인 디자인에 대한 구성원 자신들이 역할을 완전히 이해한 후 작업을 해 나가는 협조 작업의 산물이 되기를 원했다. 그로피우스는 이와 같은 과정을 공동 사회 생활의 상징이자 사회의 지적 통합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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