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저층 설계 스캔소스.

Posted 2005. 3. 2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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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의 건축

Posted 2005. 3. 26. 08:40
새로운 건축의 세대
New Generation of Architecture

첫 칼럼이다. 정해진 비전을 가지고 젊은 건축가들을 선별해 싣는다는 것이 가능한지도 스스로 의문이었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 것」에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밖의 것」은 패셔너불(fashionanble)또는 가볍다는 말과 함께 대하는 독자들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 그리고 기대했던 이 리서치의 결과를 얼마만큼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 건축가로서 우리에겐 생소하고, 아시아 전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들을 보여주고, 여러해 동안 보고 듣고 얘기해왔던 젊은 건축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

뉴욕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격이 되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가끔씩 우리들에게 어느때 부턴가 보여지고, 들어왔던 소위 「디컨스트럭션」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는 건축적 논리나 이론을 말하고자함이 아니다. 모두들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은 신중하게, 밖에서는 무슨 일이 건축을 통해 일어나는지, 대개 피상적으로 대해왔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것을 작은 바램으로 정했다. 아마도 이것이 아직 서로를 모르는 중에 논쟁의 여지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건축가들의 건축을 형태, 가능, 사고영역 등 자세히 관찰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모던 이후의 여러 건축인의 모습을 일단 보자. 그럼으로써 같이 동참할 수 있고, 현재까지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서로의 다이알로그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젊은 건축가들은 흔히 책과 미디어를 통해 단시간, 단편적으로 대했던 외국의 기성 건축가(P. Eisenmann, R. Koolhaas, B. Tschumi 등) 이후의 것들이다. 바라건데 건축을 시작하는 후배들, 다른 젊은 친구들에게 앞으로의 자신의 건축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 리서치는 프로젝트에 대한 직접적인 크리틱이 주가 되기보다는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컨뎍스트로 끌고 가고자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건축미래에 대해 비관적한 것보다는 낙관적인 프로젝트들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일반적으로 앞으로 제재되는 작품들은 「도시(urban)」,「형태(form)」, 「프로그램(program」그리고, 「미술(tech)」란 가상적 무리(virtual group)로 나누어서 봐 주었으면 한다. 젊은 건축가들의 issue를 하나의 촛점에 맞춘다는 것 자체가, 어떤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하고, 사고력을 편협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축역사를 통해 계속 이어져 오는 건축 가치들 중에 오늘의 중요한 관심을 알아본다는 목적으로 편의상 나눈 것이다. 기술적으로 스케일을 기준으로 「urban/form/program」 그리고 「tech」등의 연관성과 그 비중을 살펴보면 되겠지만 바라건데 「도시」라는 것도 항상 염두에 두기를 기대한다.

‘도시’에 대한 이전 건축가들의 과거 행적은 「도시」에 대해 소홀히 하고, 그들의 역할을 「도시적 프로그램」이나「circle-engineering」에 맡겨둔 덕분에 대개 말 뿐인 수많은 이론과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몇 년 사이의 건축가들이 「현대건축 공간」(contemporary architecture space)을 찾고자 할 때 「도시」와 함께 않는 건축가와 프로젝트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의식·무의식적으로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투영됐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도시」와 그 속의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하는 「오늘」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은 3차원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 건축은 이벤트(event), 건축형태(organization of form)등의 프로그램과 서로 밀접히 관련키 때문에 「4차원적인 것이다」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4차원」의 예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구 조선총독부의 건물을 철거한 후, 경복궁과 북한산이 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고」(seeing) 시원함을 제일로 얘기한다면, 우리는 건축을, 공간을 제대로 이해(looking)하는 것일까?

더불어 우리에겐 디컨스트럭션이 건축 이후부터의 건축 형태들을, 마치 외계인을 대하듯, 의아해 하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굳어 바라자면, 다른 건축적 요소들과 맞춰보며, 조금씩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들에게 조차도 그렇게 생소하다거나, 불필요, 부적합하다는 감정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날 ‘집’의 ‘형태프로그램’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자. 아무도 건축가의 의도된 프로그램에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화장실에서 독서를 하며, 거실에서 식사를 하고, 침실이 아닌 곳에서 섹스를 하는 것이 또 다른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 동의한다면「form」과「program」의 관계를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이론화하기도, 형태화하기도 불가능해진다. 요즘의 건축 형태들은 아마도 다른 방법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의 일부 대가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그리고 점차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는 우리들은「virtualreality」,「cyber space」,「electrotecture」(M. Taylor)등 아직 불분명한 말로써 다음 세대의 사회상을 그려본다. 아직 모두들 그것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고 어떻게 정의를 할지 모르는 지경이지만 post-high들은 건축의 모든 영역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고, 앞서 얘기했던「form/program」의 실패적 관계마저도 다른 방법으로 풀어갈 수 있는 충분한 도구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 한 두명의 건축가들의 모임에 있어서도 한번쯤은 꼭 얘기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버렸다는 것이 굳이 「tech」를 group중의 하나로 끼워 놓은 변명이 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다른 「지식」을 접한다는 것은 의식변화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여럿의 다른 건축을 본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중요성을 느낀다. 즉, 세계에 대한 더 넓은, 더 깊은 이해를 얻는다는 것이 더 나은 것을 향한 변화이고 곧 가치있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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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glas Garofalo
Derman Residence, Skokie, Illnois

The clients wished to double the size of their existing two story 「salt-box」house, and at the same time reconfigure both the exterior character and the interior spaces of the structure. Without any nostalgic attachment to the style of this building, there was a desire to take advantage of, or make excessive these banal conditions, so that each room, existing or new, became 「characterized」as a loosely connected collection of parts, no two of which are alike. The house then becomes extroverted in an episodic way, while simultaneously hybridized interior spaces. ■

 

Biography :DOUGLAS GAROFALO

1958년 뉴욕에서 출생한 Douglas Garofalo는 미국 노틀담대학과 예일대학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여기에 소개된 Oneiric House로 AIA 시카고 지부로부터 디자인상을 수상하였고, 1991년에는 뉴욕의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하였고 시카고 트리뷴지의 특집기사로 보도되는 등 새롭게 부상하는 건축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현재 UIC 대학 건축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며, 시카고 건축가 클럽의 회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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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Leeser
Max Planck Research Institute,
Munich, Germany

The architecture seeks to find a language of fluid transitions of such juxtaposed positions. Understanding the ideological and physical realities of difference as complex structures and mechanisms of connectivity, the architecture blends and mediates, thus allowing the environment to be read as a complex folding of a continuous fluid surface.
A competition for a research institute in the city of Munich, Germany, the project is positioned in between a very dense and superficially fragmented site. The institutes self described role is that of a mediator between academic research and commercial industry, thus making it a programmatic hybrid of cutting edge invention and broad commodification, resulting in nothing other than the need for yet another workplace, namely: an office.
The building, compressed, contorted and squeezed in between existing structures, almost as if internally weaving fibers of, what/want to call infrastructures.
These infrastructures, by connecting in more or less obvious ways with surrounding elements of the, allow to understand the city as a surface of a continuous and nonstatic geometry of events.
The building has no floorplans, its levels are never level. Their continuous change of elevation and direction questions the tradition of architecture and architectural representation. Floors are not clearly distinct from each other, nor can they be represented as separable

 

 

Biography :THOMAS LEESER

Thomas Leeser는 독일에서 산업디자인(Undergraduate Program in Industrial Design)과 건축을 공부하고(Bachelor of Architecture), 미국의 Cooper Union에서 5년간 교환학생으로 수행했으며, 다름슈타트 기술학교(Technische Hochschule Darmstadt)에서 건축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6년부터 Cooper Union, Pratt Inst,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Eisenmann 사무실을 거쳐 현재는 뉴욕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Thomas Leeser Architecture) 있으며 프린스턴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이태리와 미국, 독일 등지의 건축으로부터 도시개발계획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JR 철도역사, Gamagori 도시재개발 계획에 참여하는 등 일본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1/newA.html ]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Towards a New Architecture

포스트 모던 역사주의가 가진 정치적, 지적인 공허의 미몽에서 깨어나고 해체주의가 주는 형식주의적 허세를 견딜 수가 없게된 많은 젊은 건축가들은 오늘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제프리 키프니스는 선언문적 성격을 띤 에세이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영웅적 모더니즘의 정신을 회상하며 새로운 그 무엇을 향한 갈구의 방향을 제시했다. 뜻이 맞는 젊은 건축가들의 에세이와 프로젝트들을 함께 모아 출판한 AD: Folding in Architecture(1993)안에 들어 있는 키프니스의 이 에세이는 사실상 이 책 전체와 더불어 해체주의적 건축에서 새로운 folded 건축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이러한 새로운 건축학에 대한 키프니스 자신의 의도는 deformation과 information이었다.) Folding in Architecture는 많은 이들에게 1988년 현대미술관 박람회 카달로그이며 동시대 아방가르드 건축학의 지배적인 지침이었던 해체주의적 건축학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새로움을 요구하고 발전시켜야 하는가?

키프니스는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의 첫머리를 동시대 서방 세계의 새로움으로 부터의 후퇴를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후퇴는 공상에 잠겨있는 20세기 초의 정치와 건축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키프니스는 새로움에 대한 모더니즘의 대담한 접근을 높이 사면서도, 그것이 기존의 것을 말살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자 했건 까닭에 정치적이고 형식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져 결과적으로 르 코르뷔제 등이 꿈꾸던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포스트 모던 역사주의와(그레이브즈, 무어, 벤츄리)해체주의는(아이젠만, 게리, 츄미) 모던니즘의 이러한 말살과 대체를 중심적으로 비난하면서 반복적이고 조합적인 몇가지 꼴라쥬적 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고정된 수의 이질적 구성요소를 조각 조각내어 다시 짜맞추는 이러한 꼴라쥬적 기법이야말로, 포스트 모던 건축과 해체주의적 건축의 발전을 막고 새로운 정치적, 건축적 형태를 갖추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라고 키프니스는 말한다. 포스트 모던 건축의 지적 정체와 매체주의적, 정치적 정체가 너무도 자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롭고 다채로운 기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더니즘의 말살과 대체를 통하여 동질적이고 확고한 새로운 건축적,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를 했던 반면, 해체주의나 포스트 모던 건축은 다수의 스타일화된 건축과 사회적 형태를 자유로이 꼴라쥬함으로써 오히려 이질적 동질성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패들 앞에서 키프니스는 「형식적 생동감과 정치적 관련성」을 지닌 새로운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규준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규준을 제시한다. 새로운 건축은 첫째, 모더니즘이 지닌 말살과 대체의 기법을 재조합해야 한다. 둘째, 고정화된 분류로 정착되기를 거부하는 이질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셋째, 새로운 디자인 원칙을 제시하여야 한다. 넷째로,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고 추진하여야 한다. 해체주의적이거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건축은 이들중 처음 두가지는 실행해냈지만, 꼴라쥬에 의존했기 때문에 나중의 두가지는 실행하지 못했다고 키프니스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키프니스가 해체주의적 건축과 결별하는 것은 포스트 꼴라쥬적인 새로운 디자인 원칙을 제시하고 새로운 형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키프니스는 199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ANYONE회의가 열렸을 때 사회이론가 로베르토 옹거가 배부한 논문에서 제시된 다섯가지 원칙을 적용하여 새로운 정치적, 건축적 형태를 띤 추진하는 동시대 이질성을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되는 새로운 디자인 전략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규모, 여백, 포인트, 부조화, 강력한 일관성이 그것이다. 이것들 모두는 동시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건이 갖는 예측 불가능성에 걸맞는 융통성과 이질성을 도구로 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일관적이고 확고한 꿈을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디자인 원칙의 잠재적 성공과 더불어 대두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새로움을 요구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다. 모던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해체주의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키프니스의 원칙은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을 결절하기 위하여 일관된, 그러므로 유용한 정도로까지 새로운 아방가르드를 낳기 위한 규정공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 주도권을 잡고 있는 스타일(이 경우에는 해체주의적 건축)을 말살과 대체적으로써 뛰어넘는 행위로, 키프니스가 어떤일이 일더라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더니즘적 행위 바로 그것인 것이다.

게다가, 콜라주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키프니스는 새로운 건축을 위한 해체의 상징적 중요성을 간과한다. 철학자 자끄 데리다가 해체주의라 불리우는 건축 스타일에 반발하며 취했던 비판적 사고와 행동양식도 그러했다. 키프니스가 동시대 건축에 관한 다끄 데리다의 업적의 중요성을 가장 빈틈없이 집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실수는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앞길을 제시하는 듯 한 그의 에세이의 제목「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는 아주 다른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며, 이것이 새로운 건축에 대한 키프니스의 요구와 해체주의 사이에 있어서의 차이점이다. 키프니스는 무한히 다양한 이질적 모더니즘을 요구하는 동시에 르 코르뷔제를 예로 들면서 우리에게, 키프니스 자신의 생산적 콜라주작업 속에 로베르토 웅거와 르 코르뷔제를 일깨워 주었던 모던니즘의 정신을 되새겨 준다. 키프니스는 이 원칙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게 있어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 규준들이 르 코르뷔제가 제시한 관점의 개요인 모더니즘의 공간적이고 형식적인 프로젝트를 일반화하는 것으로 읽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 르 코르뷔제의 관점이 동질성을 이룩함으로써 광범하게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인 반면, 웅거의 관점은 안정된 배열이나 분류 단계로 굳어지지 않는 공간적 이질성을 이뤄냄으로써 비슷한 목적을 당성하기 위한 것이다.』 키프니스의 새로운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는 영웅적 모더니즘의 해체와 재건으로서, 1992년 여름 일본 유후인에서 열렸던 ANYWHERE회의에서 데리다가 이어 계속한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ANYONE 회의에서의 로베르토와는 달리 데리다가 건축에 관한 선언도 내놓지 않았고 특정한 건축적 반응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 대신 이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전세계적 건축시장의 시대에 있어서 건축이 갖는 책임을 요구했다. 「팩시텍쳐」라 명명한 그의 연설에서 데리다는 텔리비젼, 텔리팩스, 텔리포놀러지 등의 모든 최신 송출과 수신기술들을 고려하는 좀더 정치적으로 관련된 건축을 요구했다. 데리다는 「모든 곳」(텔레미틱스의 속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지리적인 위치가 갖는 역할이 감소하는 지역)은 정주한 것과 떠도는 것, 즉 지리적으로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 사이의 세계적인 움직임에 의해 구조적으로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팩시텍쳐」는 한편으로 특정한 한 공간과 장소, 혹은 건축물에 특권을 주지 않으면서 어떠한 공간과 장소, 혹은 건축물을 만들어내려는 지루하긴 해도 필수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이 움직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물리적인 건축물도, 그러한 건축물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도 아닌 「팩시텍쳐」는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드높은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정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한편으로 모더니즘을 비판하게 하여 모더니티 자체의 추진을 다시 재고하고 재정립하게 만들기도 한다. 더 나이가 「팩시텍쳐」는 보편적 호소력과 응용성을 지니는 세계적 건축물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와 그 세계적 생산에 저항하고자 하는 문화적으로 특정한 건축물들이 갖는 두려움이라는 이중적 관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문화적으로 특정한 모더니티의 발전 방향을 결정짓는 한편 자신들의 문화적으로 특정한 모더니티를 지시하고 발전시키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새로운 디자인 원칙의 발전에 있어서든, 새로운 형태의 실험과 추진에 있어서는 포스트 모던, 해체주의, Folded, Informed, Deformed 등 어떠한 새로운 건축도 그러한 책임을 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역적 혹은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특정성과 그들의 모더니티에 동참해야 한다는 요청은 카프니스/셔덜의 중국 하이코우시 발전을 위한 창리우 집단구역 프로젝트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 같다. 그들의 프로젝트가 미학적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이 특별한 복잡성과 미묘함을 지닌 것이라 해도, 어떠한 하나의 원칙이나 디자인 테크닉만으로는 인구 4만의 작은 지방 도시를 세계에서 가장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고 잠재력으로 가장 강대한 경제력을 지닌 국가의 산업적 문화적 중심지로 개발시키는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제시된 모델과 도면을 볼 때 이 프로젝트에서 키프니스/셔덜은 말살과 대체라는 모더니즘적 충동을 이겨내고 고정적으로 확립된 분류없이 형식적인 이질성을 끌어들이는 재결합적 디자인 전략을 사용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도면과 모델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변형시킬 때에야 비로소 이러한 새롭고도 실험적인 형태가 정말 키프니스가「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요청하는 일종의 정치적 이질성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키프니스/셔덜을 위해서나 앞으로 40만의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하이코우 거주자들을 위해서나 그러한 변형은 웅거의 다섯가지 원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팩시텍쳐」의 정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키프니스/셔덜의 모형이 성공하든 못하든, 그들은 세계적 호소력과 응용력을 가진 아방가르드 디자인 테크닉의 이름하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역적 국가적 호소력을 지닌 세계적 모더니즘의 정신에 따라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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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 model, view to s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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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 masterp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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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 concept axonomet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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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 model, street perspective

 

 

Jeffrey Kipnis
Changliu Grouping Area Haikou,
Hainan, P.R. China

개요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위치한 열대의 섬 하이난구는 중국의 경제특구 가운데에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그 수도인 하이코우는 세 개의 개발지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빠른 성장을 하고 있다. 창리우 집단지역은 관광과 무역에 중점을 둔 하이코우의 신생 도시개발지역이다. AAGDG 94에서는 중앙사업지구와 북구 해안관광지역의 마스터플랜의 컨셉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중아 상업지구(CBD)의 마스터플랜
AAGDG의 CBD 마스터플랜은 그리드와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타원형 도로 시스템을 사용하여 처음의 조직층(organization layer)과 일관된 방향으로 이루어질 두 번째의 좀 더 복잡한 조직층을 덧붙인다. 이 두 번째 조직층은 평면과 단면 양측에서 작용하는데 전체 지역을 건물과 주변전망 그리고 공공장소가 융합된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화된다.

시스템의 조직
1. 네가지 타입의 건물: 시민 문화회관, 쇼핑센터, 필로티 건물, 일반 단지 건물
2. Hard Landscape : 그늘진 휴식공간과 지붕이 덮힌 보도, 시원한 실내, 지붕이 덮힌 시장, 도시 쇼핑센터, 해양쇼, 그밖의 기존 부지와 통합된 산책로의 공공장소
3. Soft Landscape : 공원, 녹지, 잔디밭, 특정 용도의 부지, 수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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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on Fragment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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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M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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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 View Insalubrious Island#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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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 B Site #22 through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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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e #38 "Before"

 

Claire Robinson
The Paris Goose Game-Le Jeu de L'oie/Loi
Menilmontant, Belleville Paris Twentieth Arrondisement

소수 과학과 소수 문학을 자극 하여 파리 제 20구의 메닐 몽땅과 벨빌 지역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있는 도시전략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어진 백지의 비효율적 진행과정을 지양해가며 작업 하면서 「개발」이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것. 이 게임의 진행은 63개 디자인 팀이 메닐몽땅과 벨빌의 기본 구조 내에 위치한 63군데 지역에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이 비위생적인 섬들을 위한 새로운 도시적 전략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을 하는데에 있다. ■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2/Towards.html ]

 

Formal and Design

A : 「현실」은 모든 것을 (건축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한) 측정하는 것입니다.

B : 현실 속에 건축적 연구는 거의 바닥나 버렸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까.

A : 건축적 사고를 사장 현실적인 입장에 놓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조그마하게 얼어나는 건축적 실험은 배제합니다.

B : 제외시키려하는 건축적 실험들을 더욱 발전시켜 주도적이고 현실적으로
바꾸려합니다.

A : 우리의 건축적 자세는 중요하며 critical 한 것입니다.

B : 우리의 건축적 자세는 근본적이며 radical 한 것입니다.

A : 만약 건축가가 거의 지을 수 없다면, 그런 건축은 현실적이라할 수 없습니다.

B : 짓기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A : 모든 건축적 이론은 현실에서부터 시작되며, 그 속에 고착되어야 합니다.

B : 우리의 목적은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가능한 실험과 가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A : 우리는 정신적인 가치와 부적절한 현실에 저항해야 할 때를 아는 지혜를
건축토론이라합니다.

B : 우리는 현실보다 한 걸음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건축이론이라고 믿습니다.



요즈음의 많은 건축토론을 요약해보자 했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토론 자체를 축소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화 밑바닥에는 모두 「Form」이란 것을 놓아둔다. 한 쪽에서 건축형태는 original, ideal, contextual한 것을 포함한 지성의 결정체라 말하려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건축형태가 끊이지 않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불가사의까지 하다고 한다. (가끔씩은 Form 자체도 물질적이지 않다고 할 때도 있지만)

critical 하던 radical 하던 각각의 입장은 가장 넓은 보편성을 무시하고 그들의 특정함을 언급하는 정치적 행위와 비슷하다. 이렇게 물을 수도 없겠지만 어느 것이 더 나을 수 있겠는가. critical 함은 지나친 단순함과 단조로움이며, radical함은 현실에 풍부하고 기름지다 하더라도 혼란을 확대한다. 이런 것은 현실에 대한 논의도, 형태에 관한 논쟁도 될 수 없다. Form은 항상 존재한다. 형태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 「use」라 정의한다면, 이 「use」와 관련할 때 보다 나은 건축적 행위가 된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프로그램에 직면하여, 현실의 진부한 습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때 적절한 Form이었다고 한다.

20세기는 avant garde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리라는 상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장 비약적인 변화가 시기에도, 건축형태의 변화란 단지 몇 개의 상상만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쳤다. 그 결과 건축의 필수적이고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수성을 띤 채 남아 버렸고 이어져 내려온 것도 사실이다. 요즈음 세기말에 와서는 지성적인 엘리트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avant garde 역시 (패션의 일종으로 변해버리는 한) 분명한 guide line도 제공하지 못하는 듯 싶다. 다시 말해, 얼마만큼 선견지명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어느 것도 문화적인 욕구와 개인의 열망사이를 연결할 수 없었다. 결국 문화 속의 부산물들은 항상 넘쳐나는 개개인의 의지와 혼합된 상상력들 중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또한 누구의 fantasy가 가장 호소력을 갖는지를 선정하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지불해왔다. 역설이 되겠지만, 건축에서는 가능할 수 있는 형태만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와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위한 열망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A : 경제적인 면을 볼 때, 건축은 실험만을 위한 건축적 실험은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B : 현 시대에는 건축말고도 더욱 빠른 만족감을 주는 장난감(?)들로
항상 대체할 수 있습니다.

C : 문화의 발전은 더 이상 건축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고,
건축 자체를 수용한다는 믿음이 굳어 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실험을 동반하는 어느 요구는 항상 높은 위험성을 가진 게임이라서 이젠 필요 없다는 것일까. 건물과 얽혀 있는 여러 관련요소들은 (재정적, 사회적, 정치적 등등) 건축과 직접 관계하기도 하고, 서로 서로 묶여 있다. 건축적 Design에는 크게 세가지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로 나눌 수 있다. 덧붙여 결과물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의 시작은 어떻게 보이는지의 문제가 어떻게 보여야만 하는 문제를 포함할 때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질문들은 좀 더 세련된 언어로 말해지기도 한다. 예술로서의 책, 문학으로서의 건축, 기계미학으로의 건축 등 제각기 건축적 Design을 정의하려 시도하는 것들의 주제로 위의 세가지를 든다.

당연한 일로, 이런 문제들은 어느 순간에 건축 형태와 관련된 의구심과 만나게 된다. 이 세가지 물음이 서로 얽히고 설켜 가끔은 서로 통하기도 하고, 때론 혼란을 가중 시키지만, 분명한 것은 쉽게 하나가 다른 한가지를 수용한다 할 수 없다. 중요 순서를 매길 수도 없다.

반면, 어느 건축가라도 스스로 인정하겠지만, 주어진 건물을 Design할 때, 모든 요소에 같은 수준의 정성은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Design에 공헌하고 싶은 건축가들은 이러한 모든 관계들 중에서 한가지를 강조하다 보면, 다른 한가지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때에는 건축이 실험일 수 없다는 무리들에 의해 간과했던 요소가 커다란 실수로 되버리고, 그 책임을 묻는 공격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약 건축가가 Design 자체를 오래전부터 이해되어 왔고 받아들여졌던 조건에만 순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의 하나로 짐작되는 것은, Design에 대한 책임이 이론가와 비평가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건축가들 사이에서 Design에 대한 연구·토론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몇 몇의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이 건축적 분업을 위해 고무적이라고도 하겠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설령 처음부터 아무 문제없이 잘 계획되고, 적절하게 화려한 말로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건축적 태도는 지적인 어리석음이랄 수 도 있다. 또 말 자체만으로는 좋은 Design을 만들 수 없고 「Design」이 갖는 잠재력의 장점을 토론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떠한 신문기사적(?)인 힘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건축 Design에 실제적인 도움은 주기 어렵다는 사실에 동의하리라 생각된다.

가능한 또 하나의 결과는, 건축가가 필요한 것만을 만들고, 강요받는 것만을 피할 수도 없이 선택하게 된다. 더더구나 흥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건축가들은 모욕내지 무차별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이 정도쯤 되면 이만큼 우둔한 정치문화도 없고 지루한 일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를 방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필자 자신도 특정한 원칙만을 고수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런 방법이 저런 형태를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여러 종류의 카다로그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믿지 않는다.

건축과 사회관계 속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책임감 중의 하나는 「새로운 것」을 찾을 것이란 믿음이다. 건축과 관련된 부분으로는 공정적인 제도기관들의 새로운 조직이며, 사회적·법적으로 새로운 배열이다. 그리고 예술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건물, 문학으로의 새로운 형태의 건물, 기계 미학적인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찾는 것과 같다.

더욱 짧게 말해 DESIGN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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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 스테리오토믹 대상 플랜
1b- 측정선을 따라 원거리 점 투시도 자체를 교차하는 스테레오토믹 대상의
입면도, 원거리 점 방법은 투시도가 그것의 대상과 관련하여 역전되기를
요구한다. 그것의 결과는 논리에서 역전되는 것처럼 왜곡된 균형 속에서
나타난다.
2a,b. -이차원 투시도의 입면도와 상용하는 플랜을 교차하는 스테레오토믹
대상 플랜
3a,b- 스테레오토믹 대상의 플랜 날짜는 입면도로 이동한다.
4b- 삼차원은 이차원 투시도로부터 완전하게 투시된다. 스테레오토믹
대상으로서의 이차원과 삼차원 투시도는 뒷면에서 공면(共面)을 이룬다.
5a,b- 삼차원 투시도는 스테레오토믹 대상의 부분과 측정선의 왼쪽으로부터
한 때 빼졌던 이차원 투시도를 따라잡는다. 스테레오토믹 대상의 나머지는
이차원 투시도의 절취, 삼차원 투시도의 교차 그리고 아래에(그림#7)
묘사된 두번째 이차원 투시도의 기초로서 기능한다.
6a,b- 스테레오토믹 대상과 그것이 교차하는 삼차원 투시도에 의해
살짝 나타나게 된 이차원 투시도는 제거된다.
7a,b- 두번째, 이차원 투시도는 투사된다. 그것은 원거리 점 방법에 의해
왜곡되며, 최초의 이차원 투시도에 묶여였음으로 인해 다른 버젼에 의해
형성된 空으로부터 추출되어 전도되게 된다. 뒷면에 스테레오토믹 대상을
가진 이 투시도의 전면의 공면은 그것의 부분적인 합성본과 상호적인
완전한 순환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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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ton Scott Cohen
STEREOTYPIC PERMUTATION

건축적인 형태는 항상 역설적이다. 그것은 그것이 동화되고 자리매김되는 문화적 유형을 벗어나기 때문에 소외되면서도 자치적으로 남는다. 필요를 야기하는 프로그램과 형태에 육체를 부여하는 재료는 자체의 결정성과 자체에 대한 대항에 있어 주된 역할을 한다. 형태가 유형화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것은 선동적이면서도 반사적이며 자치는 대립을 통해 발전한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자치적인 건축 프로젝트는 지속적으로 그것의 권위를 가진 논쟁과 변형의 패러다임을 재확인해 주면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넘어서야 하는, 판독가능한 남은 패러다임상의 조작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균형, 연속성, 일관성, 전진, 규모, 탄성, 교차, 접힘 등의 왜곡과 같은 그것들을 분리하고 합리화 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그럴 수는 없는 것들을 통해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에 있어서의 역설의 요소가 형태적이라기보다는 비문적이라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한 선동적인 요소는 프로젝션의 투시적이고 스테레오토믹한 갈등과 동의성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스테레오토믹 변환이 시작된다.

투시도와 정서법은 매체와 동일하지 않은 인공물을 생산해내는 규율에 있어 도구적이다. 드로잉가 건물 사이의 불일치가 패러다임과 그것의 왜곡사이의 불일치와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 가능한가? 스테레오토믹 변화에서는 프로젝션의 대립하는 시스템은 기이하게 결합하여 형식적 위반의 기술이 된다. 투시도의 투시라는 원거리 점방식은 균형의 왜곡과 연속적 조작, 그리고 배열을 도입한다. 스테레오토미는 투시도와 정서법 사이의 유형적인 분리를 반박하는데 쓰이고 있다.

원거리 점방식은 투시도가 측정선을 가로지르는 대상과의 관련성 속에서 역전되기를 요구함으로서 변덕스러운 균형을 구축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비례와 차원에 있어 상이한 비슷한 배열(정서법적 대상과 투시법적 대상)이다. 전통적으로 측정선은 투시도의 집중선과 환영 對 평행관계와 정서법의 실제 차원이라는 재현의 상호대립되는 방법을 정의하고 분리시킨다. 이 프로젝트에서, 함축된 균형적 질서는 연속물을 만들 수 있도록 대상을 교차시키고 통합시키고 접음으로써 반복적으로 대상과 투시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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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erial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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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oof P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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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Garden Elevation view from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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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Plazza Entry Elevation from th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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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Longitudinal Ele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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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Longitudinal Elevation

 

Greg Lynn FORM ①
YOKOHAMA PORT PROJECT

요코하마 국제 항구 터미널은 요코하마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그곳 거주자들 사이, 다양한 형태의 수송, 그리고 도시와 수상 풍경사이의 사람과 물류의 이동과 교환이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역동적인 교류 속에서 유동의 경험과 방해받지 않는 움직임의 흐름을 경축하는 계기의 일환이다. 순조롭고 지속적인 움직임은 터미널의 도시와 바다에 관한 관련성 뿐 아니라 항구의 국제적인 기능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도시의 입구라는 전통적인 기능은 도시의 거주자들과 바다를 통하여 그 곳을 찾는 사람들 사이의 관문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와 유사하게, 항구 터미널은 역사적인 도시조직의 일부도 그 배후의 수상 풍경의 일부도 아닌, 평탄한 모습의 도시의 관문을 상징한다. 그와는 달리 이 프로젝트는 진입부위에 위치하고 방파제 전체에 걸쳐 도착시간을 연장시킴으로서 육지와 바다사이의 갑작스런 이동보다는 지속적인 연속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확장은 도시와 그 풍경으로부터 바다로의 점진적인 이동을 확보하며, 방문객과 거주민이 함께 섞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젝트는 행인과 시민들의 역동적인 혼재상태를 포착한다. 그것은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수직적 출입이 아니라 도시와 녹지 사이의 공간과 시간의 수평적 연속이다. ■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5/formal.html ]

 

Artificial Modernism in the Space of Flows
흐르는 공간에서의 인위적인 모더니즘

현대도시의 경계선과 coordinate는 더욱 유동적으로 변화할 뿐 아니라 더욱 덜 공간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많은 도시학자들은 새로운 「비(非)지리적(ageographical)도시」를 염려한다.「비지리적 도시」란 비평가 마이클 소어킨이 붙인 말로, 공간적이라기 보다는 televisual한 형식적 배치를 일컫는 것이다. 이 새로운 도시 형태는 마치 텔레비젼처럼 공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고 기괴한 기운을 풍기면서 이웃과 이웃, 지역과 지역, 그리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주는, 그야말로 실타래같은 비물질적 도시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소어킨의 주장대로라면 televisual한 흐름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지리적 도시에 관한 소어킨의 설명이 시사하는 바는, 현대도시의 획일성 속에서 공간이 갖는 그나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현대고시를 규정짓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유통과 정보의 유동자본(fluidity capital)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유동자 본 속에는 운송의 기능을 갖는 통로 즉 고속도로, 철도, 해로, 항로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흐름도 포함한다. 이제 도시는 외부와 내부의 확연한 구분을 잃어버리고 무정형의 덩어리라는 형태를 취하여, 자체에 내부도, 외부도 갖지 않는 물질과 물질의 거대한 흐름을 차단하고,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도시학자 마누엘 카스텔즈는 이 현상을 보고, 자신이 「흐름의 공간」이라 명명한 것이 발전의 정보적 양상인 신(新) 사회 기술적 조직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이 조직은 전 세계적 규모로 행해지는 자본의 재조직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Wim Nijenhuis는, 도시는 이제까지 단순히 공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교통흐름의 산물이 었다고까지 이야기 한다. Nijenhuis에게 있어서 도시란 결코 굳건하고 안정적인 장소라든가 공간의 한정자 혹은 형성자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도시는 단순히 「교통 양상만이 달라지는」것으로, 흐름이 집중되는 하나의 정점일 뿐이다.

소어킨을 비롯한 진보적인 건축 비평가들과 도시학자들은 대개 이 새로운 유동적 도시의 등장에 관하여 전혀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새로운 도시의 등장은 과거 누구보다도 특히 마샬 버어만이 획기적인 연구 「팔리는 것은 모두 대기 중에 녹아든다」를 통해 향수적인 논조로 현대성과 현대화를 다루면서 이야기했던 가까운 (of propinquity) 도시들의 활력을 없앤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버어만이 그래야 했던 것과 같이 이 새로운 환경을 - 사실상 새로운 것이라면 - 전통적인 도시에 관한 생기없는 모조품으로 보아 여러 역사학자나 비평적 종교학자가 고립시키는 이러저러한 것들 속으로 후퇴해 들어가기보다는, 역동적이고 복잡하며 인공적인 생태환경으로 재해석하여 자기조직적인 체계(예컨대 고속도로에서의 교통의 흐름 같은)가 갖는 추상적이고 기계적인 지능 등 다양한 형태의 생활을 제한하고 또 형성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볼수는 없을까? (레이너 번험의 「로스엔젤레스 : 네가지 생태환경의 건축」은 복잡하고 생기 넘치는 도시관(view of the city)에 관해 유감스럽게도 잊혀져 버린 놀라운 예를 제시해준다.) 그러는 과정에서 건축은 또 다시 전체적 범위의 매몰된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힘 속으로 들어가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의 공간을 형성하고 그 흐름에 개입하여 재이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주택과 안전이라는 전통적 임무에 짓눌리지 않게 된 이상, 이제 건축은 도시 속에, 그리고 흐름의 공간속에 긍정적이고 창의적이면서 무반응적인 하나의 힘으로 자라잡게 된 것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이처럼 도시를 유동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진보된 건축의 예들은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이 도시에서 수행했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건축가들은 더욱 많은 구식공간 조작자들이 흔히 그랬던 것과는 달리 도시질서의 창조자이자 사살상 무질서의 창조자라는 특원적인 역할을 놓지 않으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기호학과 기호학적 분석학, 그리고 특히 소쉬르와 롤랑드 바르트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심리학자 자끄 라깡의 포스트 모던 구조주의 언어학 체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비지리적 도시의 telematic한 움직임에 편승하여 의미 그리고 의미의 무한한 유예로서의 의미는 공간적 질서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게 되지만, 건축가들은 그 의미가 끼어들어 흐름의 공간을 형성하도록 허락할 긍정적인 역할을 모조리 포기하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 포스트모던 건축이 안정성과 질서의 고전적 형태를 표방함으로써 혼란스러운 흐름의 공간을 길들여 보려고 시도한 반면, 해체주의 건축은 흐름의 공간의 형태를 답습하거나 표방함으로써 무질서를 야기시킨다는 점을 심각하게 염려하게 되었다. 샤를르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관한 묘사를 반쯤은 영속적이고 한편으로 반쯤은 급속히 변동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면서, 포스트모던 건축은 모더니즘의 질서적인 반쪽을, 그리고 해체주의는 그 중 무질서한 반쪽을 떠맡았다. 겉보기에 해체주의와 모더니즘은 많은 면에서 서로 대치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대표적이고 의사소통적인 건축의 발달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되고 있었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안정성을 표방한 반면,(벤츄리와 스코트의 전위(pop)콘텍스트 이론이 갖는 의견상의 자유조차도 Tafurian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라스베가스의 전위감각의 난폭함을 증대시키기보다는 단순히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방책에 불과했다.) 해체주의는 불안정과 해체의 미학을 가지고 불안정을 표방하고 있었다.(해체주의의 정신분석적 모델 - Bernard Tsumi의 라 빌레뜨의 pointfolies, Peter Eisenmann의 발굴, 그리고 해체주의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비평가 Mark Wigley 자신의 데리디와 하이덱거를 프로이드적으로 읽은 경험 - 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보건데 해체주의는 영원한 치료책의 형태로 포스트모던즘보다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견고화를 제시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쪽을 떠맡도록 강제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경우에는 contextuality를 해체주의의 경우에는 '텍스트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하는 식으로 그 속에 매몰되도록 강요된 흐름을 크게 바꾸지 않고 따라하고록 강제되다 보니 건축은 기가 죽어서 도시 배역과 논리, 형태 속에 긍정적으로 간섭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Rem Koolhaas가 「기호학의 악몽」이라 명명한 것으로부터 깨어난 오늘날에 와서는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질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웅적 모더니즘의 강인한 전투적략으로 회귀한다든가 그 두 극단 - 영속적인 측면과 급변하는 측면 -을 지속한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라 常存하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복잡한 질서로 회귀한다는 의미이다. 건축과 도시주의에 대한, 이처럼 새롭고 post적인 혹은 기호적인 접근들은 - 생포드 퀸터의 「부드러운 도시주의」와 그레그 린의 곡선과 우연성 혹은 유동적인 논리, 제프리 킵니스의 「Intensive Coherence」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는데 - 현대성과 현대화의 일치원적 공간성(spaciality)과 일시성을 표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순, 꼴라쥬, 혼돈 역시 표방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공유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게는 이 접근들 모두가 內在 혹은 환경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인공화라는 조건이다. 인공화는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으로서 현대화가 점하고 잇던 위치를 이어받게된 한 과정이다. 현대화가 엄격히 강요된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인공화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혼돈과 질서, 자연과 문명, 현대 이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사이의 구분을 흐려 놓는다. 자연이 현대화한다는 것은 문명에 순응한다는 것이 아니다. 바다가 현대화한다는 것은 흙으로 매립되다는 개념이 아니며, 동양이 현대화한다는 것은 서양화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인공화란 오히려 문명적이고 자연적이며, 거친 바다와 길들여진 육지를 기초로 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기계론적인 일차원적 시간 속에서 앞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그것이 길들여지지 않고 자연적이고 거칠고 무질서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조직화했던 반면, 인공화는 기존의 복잡성을 자연 속에 가두어둔 채 새로운 배열, 조합, 증식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극대화한다. 인공화는 온갖 수단을 통해 재분배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활발하게 질서를 혼돈 속에 붙잡아 맨다. 인공화라는 조건 속에서 윤리학은 규범을 대체하게 되었고, 흐름들에 저항하거나 대표하던 것이 그 흐름을 형성하고 물결치게 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껍데기를 두른 채 위장하고 잇던 부정적인 요소 대신 강화와 즐거움, 긍정, 자유, 기쁨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모더니즘 자체의 새롭고 긍정적인 種인 인공적 모더니즘의 부상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비평가들이 이 새로운 인공 모더니즘을 이론화 하는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는 했지만(이 비평가들의 인공적 모더니즘이라는 명칭을 갖다 붙인 적도 없었고 아마 내가 이런 이름을 붙인데에 도의하지 않을 것이다.) Rem Koolhaas와 그의 메트로폴리탄 건축 사무소야말로 인공적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굳건하고 탁월하게 세워놓았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Koolhaas는 건축을 위한 흐름의 공간이 시사하는 바를 어떤 현대건축가들보다 더욱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도시적이고 포스트 도시적인 형태에 그 흐름이 끼치는 혼란스런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Koolhaas는 거친 혼돈의 흐름을 길들이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영웅적 모더니즘적 강박관념과 혼란스러운 형태의 우산을 창조함으로써 혼돈을 나타내는 두가지 행위에 모두 저항이며, Gilles Deleuz가 제임스 조이스를 본받아 chaosmos라 명명한 바 있는 예측하는 것도, 미리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한 차분한 혼돈을 창조해 냄으로써 형태의 우산에 구멍을 뚫어 작은 격류가 들이닥치는 것을 허용한다. Koolhaas는 초현실주의의 과도하게 이상적인 분석적 전통, 특히 살바도르 달리의 「편집 비평적(paraniod-critical)」기법을 고수한다. 이 기법은 OMA의 프로젝트 범위 내에서 통제된 무질서를 포착하여 재배분함으로써 「메트로폴리탄 건축」을 위한 기초를 형성한다. 복잡한 상징(representation) 대신 「복잡한 야망」을 사용하여 Koolhaas는 자신이 『분석을 창조와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객관적인 척하지 않는 이성적 방법』이라 표현하는 편집적 비평방법이 창조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열광하는 뉴욕」에 맨하탄을 위한 「소급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Koolhaas는 뉴욕의 실질적이고 인공적인 모더니즘 이론을 분석한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최근 아틀란타와 싱가포르에 관한 분석을 하면서 처음 보기에는 구속적인 듯 해도 후에는 편집 비평적 극단으로 변모하여 거의 무한에 가까운 정도의 자유를 제공하는 인공적 이론을 발견한다. 그렇게 해서 Koolhaas는 무질서한 흐름의 공간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또 역으로 뉴욕의 그리드나 아틀란타의 건축규제법에서와 같이 제한을 통해 자유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들 복잡한 논리에 관한 Koolhaas의 분석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도시개념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Koolhaas는 인공적 모더니즘에 관한 탁월한 학자가 된 것이다.

「편집적 비평」 분석 이론을 보완하기 위하여 Koolhaas와 OMA는 도시의 혼돈 속에서 chaosmatic한 질서를 포착하고 그것을 증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전례없는 「큰 건물」을 개발했다. OMA는 이엄중한 분석 이론을 흐름의 공간을 깨고 또 엮는 이론과 결합시켜 대규모의 도시형태를 만들어낸다. 이 도시 형태는 이들 흐름 속으로 개입하여 그들을 재배치하는 유동적이고 매몰된 사회의 농축기이다. 이렇게 해서 OMA는 도시와 포스트적 도시의 유동적인 움직임을 형성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바다의 흐름과 육지 교통의 흐름을 집중시키고 재배분하는 Zebrugge 해상 터미널을 위한 그들의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관심을 볼 수 있다. 또 로테르담의 Kunsthal 미술박물관의 구비치는 듯한 램프의 모양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예술과 자연, 상업과 레져의 확실한 구분을 와해시키고, 유동적인 보행자의 물결에 의해 바깥 환경으로 옮겨지는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렇게 해서 OMA는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렇게 해서 OMA는 기존의 도시환경을 특징 짓는 숨겨진 질서를 포착하여 둘러싸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율적이고 인공저기인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대규모의 큰 빌딩조차 능가하는 OMA의 Euralille는 메트로폴리탄 건축을 전체 도시 수준에 적응시켜 보려는 그들의 시도이다. 사실상 Euralille의 사업지구와 TGV 열차역은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을 있는 정보와 교통의 흐름의 공간에 있어서 주요한 마디이기 때문에, Euralille은 OMA의 메트로폴리탄 이론을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여 저 디즈니의 인공화에까지 필적할 만한 인공적으로 실질적인 도시를 창조해낸다.

궁극적으로 말해, 인공적 모더니즘이란 미지의 자유가 있는 자율적 세계로 번창해가는 세계, 복잡하게 배치된 질서가 요구되는 세계 속의 건축에 있어서 단지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모양 둘 다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껏 오랜동안 부패하고 복잡하며 자본화된 세계를 피해 옹크리고 있던 건축 정책이 오늘날 이토록 복잡한 문제로 부상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모세혈관에 흐르는 절대적이고 폭넓은 세계적 자본 때문이지 비젼과 의지 혹은 비판적인 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 요구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흐름의 공간에 간섭하는 작업은 「정치적」이라든가 「모던하다」는 이름의 값을 하는 건축물만을 생산해낼 것이다.空 (번역:김근희)


Tohoku Historical Museu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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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토쿠 현의 센다이 시 외곽에 제안된 이 박물관은 이 지역의 농경문화의 유산에 교훈적인 초점을 맞춘다. 이들 전시 공간에는 풍부한 쌀농사의 문화의 더불어 계속 생겨나는 신화와 민담, 그리고 전통과 제례 의식들까지도 밝혀내고 북돋우려는 인공물들이 있다.

오늘날의 호토쿠는 괄목할 만한 사회적, 정치적, 지리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지역의 일본 젊은이들은 비(非)농경적 물품과 공업시설, 특히 가전제품과 하이 테크놀러지 상품들을 점차 높게 평가하는 추세이다. 도시화가 이곳으로 밀려오고, 도쿄를 연결하는 고속열차, 그리고 사방으로 뻗는 고속도로들이 빠른 속도로 다채로운 이곳 역사의 물질적인 증거들을 지워나가고 있는 지역에 이 박물관은 들어서 있다.

박물관이 있는 위치는 수세기동안 쌀농사에만 이용되었던 별 특성없는 평탄한 땅이다. 옛날 농경활동이 벌어졌던 흔적들은 한 때 토지의 구획과 소유를 표시하던 구분신의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있다. 우연히도 이 설계의 구성은 한 때 들판에 씨가 뿌려지고, 물이 넘쳐나고, 흙을 갈던 시절의 흔적이 칼자국과 상처를 변하여 남아있는 외로운 땅 위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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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두 개의 관개용 수로는 이 계획을 위해 조직된 고안품으로서의 기능과 공공 순환의 주요 도로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수로의 투명한 바닥을 유리로 뒤덮은 듯한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갖가지 정원들과 전시장들이 보인다. 이 수로의 끝에는 이곳의 북쪽과 서쪽을 둘러놓은 벽과도 같은 커다란 구조물이 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이 프로그램이 갖게 되는 비공개적 장소들이다. 행정 사무실, 연구실, 문서 보관실, 커다란 창고 등이 그것들이다. 이 벽과 같은 구조물의 비스듬한 모양은 박물관의 다른 구조물들에 대한 배경으로서도 기능하고 인접한 고속도로와 고속열차의 철로에 대한 방어벽으로서도 기능한다. 움직이는 열차나 자동차에서 보았을 때 이 박물관 단지는 비스듬한 지붕이 눈높이 아래로 지나갈 때만 잠시 보일 뿐이다. 벽 모양의 구조물과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다른 구조물들 사이에 놓인 안쪽 정원은 전통적 기법으로 축소모형과도 같은 배경을 조성하고 있다.

정원이 굽어보이는 유리에 반사되는 기차와 자동차를 빛이 스피드와 현대서의 흔적들로 이 장소에 스며든다. 한편 아래로 비스듬히 처져 내려오는 형태를 한 각종 전시장들의 지붕은 의식적으로 전통을 추상화하여 신성한 일본식 형태로 만든 것이다. 현대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를 병렬적으로 배치해놓은 것은 이 박물관이 발 구성된 역사를 여러 면에서 구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준다. 이 박물관 내부를 죽거닐다 보면, 과거와 현재간의 그리고 사실적인 것과 꾸며진 것 간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려는 힘겨운 시도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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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ASYMPTOTE Architecture
1987년 Lise Anne Couture와 Rashid가 설립한 건축사무소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스튜디오에서는 명상적이고 이론적인 프로젝트들에서 빌딩과 도시계획 proposal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을 다루고 있다.

Lise Anne Couture
Yale 대학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뉴욕의 Bernard 대학과 Columbia 대학, Montreal 대학, Harvard 대학의 GSD 등의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그녀는 1990년 뉴욕의 Parsons 디자인학교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교수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그곳에서 재직중이다.

Hani Rashid
Cranbrook 예술 아카데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와 스웨덴의 Lund 대학, 미국의 Sci-Arc, Harvard의 GSD 등의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그녀는 1990년 뉴욕의 Parsons 디자인학교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교수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그곳에 재직중이다.

 

 

Yokohama International Port Terminal ①
(Alejadro Zaera-Polo & Fashid Moussavi)
-First Prize

부지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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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인구 300만의 도시로서 도쿄에서 30km 떨어진 일본 제일의 국제적 항만도시이다. 상업과 사업의 중심지인 칸나이 지구 한가운데에 위치해 잇다. 1894년 일본이 개항하면서 해외 무역을 위해 칸나이 지구 한복판에 처음으로 건설한 항만인 이곳은 그 후 무역량의 증가에 따라 터미널 시공 예정지인 현 오사나바시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오사나바시 항은 1894년 강철로 건축한 최초의 현대적 항만이며 이때 취약한 지반을 처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인 스크류 파일링 기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사나바시는 토목공학 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사나바시 항은 북쪽으로는 만으로 돌출해 있고 남쪽 끝으로는 칸나이 지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요코하마공원, 서쪽으로는 「붉은 벽돌 공원」을 계획중인 신코 지구에 인접해 있다. 1979년 이래로 요코하마 시에서는 오사나바시항의 서쪽 미나토 미라이 지역을 개발해왔다. 목적은 도쿄의 산업적 중심지를 분산시킬 수 있고 시민들이 항구를 만끽할 수 있는 지역을 건설하는 데 있다. 전체적으로 그물망과 같은 녹색공간도 현재 건설중이다. 카이코 하오바, 야마시타 공원, 조노하나 공원, 붉은 벽돌 공원 등이 모두 이 개발 계획 중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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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일본 최고(最高)의 건축물 랜드마크 타워와 후지산을 배경으로 하여 눈에 들어오는 만의 광경은 요코하마의 상징으로서 이 장소는 그 정경의 일부가 된다. 이 터미널의 국제현상설계는 국제적인 이 항만 터미널이 방문객들을 위한 선박 터미널로서, 그리고 요코하마 시민들에게 다양한 쾌적함을 제공해줄 공공 장소로서 기능하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프로그램은 선박 터미널 공간 17,000㎡, 시민들의 쾌적함을 위한 공간 13,000㎡, 그리고 물류 수송 시설에 필요한 공간 18,000㎡, 합계 48,000㎡의 면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건물은 매년 53,000명의 승객이 드나드는 곳이다. 이 프로젝트의 예산은 20억 파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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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ign Office Architects
Alejandro Zaera-Polo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으로 마드리드의 E.T.S. Architecture를 졸업하고, Harvard의 GSD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93년까지 O.M.A.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Foreign Office Architects Ltd, 의 Director이며, 마드리드의 E.T.S. Architecture의 위촉 비평가로 활동중이다. 그의 부인 Fashid Moussavi와 함께 최근 Yokohama International Port Terminal 당선자이다.

Fashid Moussavi
이란 Shilraz에서 출생. 스페인의 E.T.S. Architecture를 졸업하고, Harvard의 GSD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93년까지 O.M.A.에서 활동했으며, AA의 Master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런던의 AA의 Director, 마드리드의 E.T.S. Architecture의 위촉 비평가로 활동중이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6/artificial.html ]

e(Wo) Men The Trajectory of Another Generation
또 다른 세대의 궤도

e(Wo) Men는 너무 일찍 태엉나지도, 늦게 태어나지도 ?았습니다. 그들은 2차대전도 한국전쟁도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행을 감수할 수 있는 전문세대(?)들을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살이 됐을 때 「내 인생에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지루한 인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이후의 삶은 전쟁 이후 살아 남고자 했던 사람들(실존주의자)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나 까뮈 클럽에 들어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도록 권하기도 합니다. 허나 많은 뒤들이 천장 위에서 - 무엇을 먹는지는 모르지만 - 열심히 먹는 것을 본 후 그들은 누구보다도 낙천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Tschumi, Meier, Eisenman, Koolhaas들의 부등하게 보이는 듯한 위치 때문에 항상 2등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들의 미래가 부끄러움이 될거라고 예측을 합니다. 그렇게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Wo) Men은 달과 은하수를 원합니다. 그들은 Le Corbusier나 Wright 이후의 가장 큰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Le Corbusier가 파리의 9/10를 계획했다면, 그들은 모든 도시를, 모든 지역을 디자인하길 원합니다. 「조그마한 평면은 그리지 말라」는 것은 그들을 야심찬 목적을 위한 격언입니다. 맨하탄을 유리돔으로 덮는 제안과도 같이 그들은 커다란 파도를 생각합니다. 이 커다란 파도는 그들을 유혹합니다. 도시는 근교, 외곽, 끝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그들을 매혹시킵니다. 마치 볼셰비키가 역사의 고속기차를 타려 했던 것처럼 파도를 타려합니다.

역사의 파도를 타는데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동화에 나오듯 손가락으로 구멍난 방파제를 막으려 합니다. - 찰스 왕자, 생태학자 그리고 데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비평가처럼 운하를 만들어 한 쪽은 좋은 물, 다른 쪽은 나쁜 물로 갈라 놓습니다. 그리고는 윤리문제로 변해버립니다. 또는 모던니스트나 미래주의자처럼 파도의 가는 방향대로, 그물결을 타면서 얼마 만큼 즐겁고, 유용한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 방법 역시 많은 재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파도가 가라 앉고 나면, 그곳엔 완전한 건물도 없고, 실수는 컸고, 상금만 후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도 확신하는 만큼 수치심도 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부끄러움을 예측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은 파우스트 같습니다. 그들 역시 악마와 거래를 하면 후회가 따른다는 것을 아는 듯 합니다. 그런 그들도 보상은 받습니다. 창조력과 파도타는 방법입니다. 밀기도 하고 브레이크를 걸며 파도의 빈 공간 속에서, 거품 섞인 태양을 껍질 삼아 있다는 것은 최고의 종교적 경험과도 같을 듯 싶습니다. 더구나 관중들은 그들을 부추기기도, 기도해 주기도, 또는 잊어버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또한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e(Wo) Men은 궤도 밖의 것을, 터부시 되는 것을, 또 아류라고 치부되는 것들, 진부하고 넌더리 나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어쩌면 나쁜 것을 좋아하는 그들이라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한 때는 인간의 힘과 대량생산, Brave New World 그리고 모든 쓰레기의 자유분방한 가능성을 믿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초현실주의(지극히 현실주의)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큰 파도, 대량생산, 인간의 힘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곳곳의 여러 사업들은 파시스트처럼 그들을 선동하고 억누릅니다. 그들도 이런 재난의 물결을 타려고 벌써 스스로 인정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부하려 했던 것들을 - 전체주의, 경제적 압력, 일반계획론, 백지 계획론 -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파괴되면 무엇이 남을까 발견하려 합니다. 그들은 탐험자들입니다. 그들은 미래고고학자들입니다.

e(Wo) Men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사람들은 라스베가스에서 건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곳에서건 건축을 배웁니다. 그들은 post-mosern modernist이기도 modern post-

modernist이기도 합니다. 모더니즙이 끝나는 날, 그들도 어떤 부류로 남아버리겠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지향합니다. 그들이 모더니즘의 동굴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나, 다른 많은 post-modernist에 감염되어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post-mosern을 좋아 하지 않는다 해도, 결국 전에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post-mosern의 상상과 능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때때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추상적, Mies적 껍질을 씌워 아직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에 재한되려고도 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혼란은 도움이 ?도 하는데, 많은 수의 관중들은 그러한 프로젝트를 열망의 object로 꾸준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미완성의 modernity project(post-moderniy?)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들의 초현실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post-mosern의 프로젝트도 계속합니다. 그들은 두 토끼를 잡으려 합니다. 관중들의 희망과 환타지적 프로잭트들입니다. 그들이 갖는 매력 중의 하나이지만, 그들은 어느 곳에 자신들을 놓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틈 사이로 빠지는 방법입니다. 그런 어느 경우든 파도를 타는 사람은 얼마만큼 시원한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1970년 후반부터 만들어진 저질 그림들이 많은 도시 중심에서 실현되었습니다. post-punk, 추한 만화들이 서투른 방향을 제시했고 스스로 축하도 했습니다. 그것들은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도시의 현실을 반영했습니다. 미대륙 서부의 Gehry도 한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Gehry 것을 보고 난 뒤 자신들도 나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작품은 힘을 발휘하고, 추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했습니다. - 한 마디로 Bad(Good)이었습니다. 1층은 Le Corbusier, 2층은 Mies van der Rohe, 그 위에는 Gehry의 재료로 덮었고, 안에는 Tadao Ando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 그들이 원하는 한 어떤 원리나 현상도 받아들입니다. 자유분방함을 제치고 많은 모던적인 다원론은 지향합니다.

합성하는 방법 첫째, 상세도면은 없습니다. 순수한 형태와 재료들의 혼합입니다. 혼합하는 방법 둘째, 미쳐 버린 논리. Le Corbusier와 같은 점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upside-down 논리를 좋아 합니다. 셋째 방법, ramp 또는 floor전체를 엇갈려 놓는 것,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늘이 발전시킨 방법입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의미도 없고, 크기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건물을 읽는 이들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건물은 서너 번 힐끗 봄으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Wo) Men은 그들의 건물 옥상에, 도시 중심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조각물이나 치장, 어떤 것이 영구한 것이고 어떤 것이 보다 가치있는 것인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건물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e(Wo) Men의 커다란 생각은 매우 작습니다. 오늘날 혼합문화적, 생태학적, 지역적, 세계적인 크기의 생각과 행동들이 일어나지만 아직 건축적인 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아직 아테네 선언문이나 도시계획, 후기 자본주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가들은 자본이 어디로 가든 그것이 움직이고 멈추는 곳에 떼지어 몰립니다. 부티크 건축이 커다란 파도의 건축과 같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 다른 이름이 주어져야 합니다. 건축(建築)과 전축(錢築)이라고 달리 말해야 합니다. 「누가 전축을 잘 하였을까」. Foster, Piano, Rogers, Pelli 등입니다. 이들 중에는 e(Wo) Men과 같은 창조적인 광기를 가진 사람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이것 역시 모던 건축가 혼합 현상입니다. 너무 큰 것을 생각하다보면 대개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그들 역시 가끔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건물은 너무 큰 건축가들보가 덜 지루합니다. 왜냐하면 커다란 것의 참 맛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구조적 유형입니다.

미대륙의 문화는 능숙한 avant-gardism의 혼합과, 새로운 충격, 기본적인 멋, 부르조아적인 기풍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미대륙의 문화와 그 법칙은 아마도 1960년대 이후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깊고 오래된 문화와 법칙이 산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대륙에서 일류 그룹에 속하길 원한다면 적어도 유럽이나 아시아쪽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혹 Peter Eisenman이 그들 속에서 있다해도 잘못된 곳을 택해 태어났습니다.

e(Wo) Men은 New York-London-Tokyo-Taiwan … 시민이 되길 원합니다. 아니,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여권과 함께 New York에서 깨어나 Pari에서 일하고, Hong Kong에서 식사를 하며, Tokyo에서 잠을 잡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여러나라 말을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e(Wo) Men은 영화 스타가 되기보다는 감독이 도길 원합니다. 그들의 건축은 narrative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New York과 같은 문화의 밀집지를 바라 볼 때 정신착란을 일으키느 것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많은 영화들이 동시에 상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 속에서 그들의 narrative 건축을 소개하고 발전되기를 원합니다.

e(Wo) Men의 탄생은 적어도 나이를 갖습니다. 14명의 나이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탄생할 것입니다. 空(글/공철)



 

 

Ben van Berkel ①
Erasmus Bridge, Rotter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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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교(橋) 디자인에는 처음부터 공간적이고 계획적이며 공학적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영향을 끼쳤다. 구조적이고 콘텍스트적인 힘들을 이 프로젝트 속에 짜넣는 과정에서 다리는 연약해 보이는 한편 분명한 비대칭을 이루게 되었다.

도시의 간판 기둥인 이 다리를 통과하는 교통량은 매우 많으며 다리는 도시 내의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동시에 도시 중심가와 북적거리는 Kop Zuid 개발지구로서 두 지역이 지나는 이질성을 확고히 해준다. 양쪽의 강가가에 펼쳐진 발전 양상에 맞추어 드높이 뻗어오른 교탑(橋塔)은 로테르담의 상징적 관문이 되고 있다.

Noordereiland는 중심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하면서 NieuweMaas강과 Koningshaven 도크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이어 교탑이 배치되어 있다. 다리 차도(車道)를 비대칭적으로 분할하여 고정적이고 확고하게 구분지은 것은 그러한 상황 때문이며 이로써 교탑에 집중된 힘을 나타내는 버팀(stay)들의 분할이 명백해진다. 교탑은 다리의 두 구간을 연결하면서 그 중간 부분에서 수평에서 수직으로 두 각도를 이룬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느다란 다리 차도(車道)는 수면 위로 비치는 정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강을 건넌다는 것 외에, 그 시각적 효과 덕분에 도시 높이와 수평으로 놓인 이 다리는 피팅과 계단의 세밀함에 있어 입체감 있는 전형이 될 수 있다.

교탑에서 직립한 부분의 각도는 힘의 작용을 끊어주려는 과정에 나온 결과이다. 교탑은 139미터라는 비교적 제한된 높이를 지니는데 이 높이는 다리 차도의 길이와 1:2의 비율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교탑은 기존의 모델들보다 더 무거운 하중을 갖게 된다. 힘과 교탑의 역률(moment)이 충돌하다보니 그 과정에서 커브가 생긴다. 이 휘어지는 선에서 윗부분의 각도는 대체로 모멘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다리가 중요성을 띠는 것은 그것이 이처럼 복잡한 힘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 다리는 힘들을 파괴적으로 이용하고 도시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로테르담에 참고할 만한 새로운 시각적 포인트를 가져다주고 있다.

 

 

Donald L. Bates ①

Donald L. Bates ①
Meaux - Europan Competition, 1994 Meaux,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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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의 프로그램은 18세기에 형성된 이 지역의 인구밀도를 높이는 한편 이 지역을 재(再)도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큰 도로 하나가 모(Meaux)라는 이 도시지역을 뚫고 지나가면서 현재 조각조각으로 분열된 모습을 하고 있는 도시 짜임새를 갈라놓는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주택과 사무실, 서비스업, 공립 중학교 증축, 공공 설비들이 필요하고 이것들은 이 지역에 맞바로 인접해 있는 새 공무(公務)단지와 어우러져 건축적인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이 디자인 전략은 전체 지역에 포괄적인 구조를 부여하면서도 프로젝트 속에 담긴 프로그램의 분명한 각 차이점들을 계산에 넣을 수 있는 계획 및 건축 논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 프로그램은 상업시설을 배열하고 수많은 주택들을 세우며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시설들을 설치하는데 알맞는 것이면서도,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획일적인 조판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면서 그것을 상당 기간에 걸쳐 기존의 도시기반 속에 짜넣기로 했던 결정에 알맞는 것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 안에는 그에 따른 명확한 차이점들이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되면 앞서 말한 논리는 그 구체화된 차이점들을 수용한다. 이것은 단일 논리의 도시주의를 거부하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면 계획 - 밀도를 높이는 구조

이 새로운 계획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의 짜임새를 바꾸는 일 자체가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그 결과 도시의 구조는 이 지역의 인구밀도를 높이고 지역을 거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여야 한다. 이들 도표를 보면 신(新)개발 기간동안 이 지역에 맞는 변화가 어떻게 도시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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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7/emen.html ]

 

Between the Political Form and the Architectural Form
정치적 형태와 건축 형태의 고리

인류 문명사 중에서 유태문화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엄격하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원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태문화의 신격인 여호와는 스스로 얼굴도 없으며, 매우 복잡하기도 마치 수은같이 잡히지도 않는 형상을 한다. 그럼에도 세상을 만들었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심오한 열정과 모세·아브라함의 혼란까지도 포함한 「말」로써 우리에게 표현했다.

유태인의 신은 궁극적으로 정적인 동상에 대해 우상숭배하는 것을 대체했다. 히브리 사람의 신은 엄격한 문자 곧이 곧대로 행동해야 하는 율법과 실록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유동적이고 실행적이고, 유연함을 특징으로 한다. 역사 속의 유태인의 이집트에서의 대이동은 그것 자체로서 다양한 사회적 분해 행위이기에 충분했다.

- 첫째로 자유로움을 대초원 위에 풀어 놓은 다음, 시내산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Type」을 부여받는다. 둘째로, 그 당시 포악한 두 가지 형태가 파라오적 종주권과 비개방되고 기념비적인 형태를 순종하는 것이라면, 대이동은 그런 엄격한 관계에 대한 도전과 해방이었다.

Bruno Zevi의 이론에 까지 이르는 유태인의 공간은 오로지 에피소드적인 배경이고, 그래서 피라미드같은 단순한 형태를 가진 왕권에 대해 유연하고 급진적인 대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태 전통의 탄생이 전체 역사 속의 신비로움을 파괴하는 것을 주로 구성한다 해도 그것은 (훗날 우리가 고전주의라 인식하는 것들) 유태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인의 이상에서부터 였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후기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 그리고 이후의 연속되는 것들은 완전히 타락되고 미신화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관료적 가치를 가진 「대칭」과 「비례」를 기본으로 한 질서 예찬이다. 이것은 우리를 가장 허약하게 만들고 숨막힐 듯한 감각으로 이해되는 장님의 질서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적 순리를 유동적이고 뿌리채 뽑아 뒤엎고 새 것을 만드는 것이라 감히 말한다면 고전주의는 왕권을 형성화 했고, 순수함과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자신도 모르는) 의지만이 겉으로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었다.

필자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은 이밖에 또 다른 형태주의도 확신한다. 그 예로, 비형식적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독재 형태는 평온한 환상, 안정된 허상, 역사의 내면을 창조하기 매우 쉽다. 우리들의 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들의 힘이 다른 모습으로써 한층 더 격렬했고 우리는 이것을 modernization이라 부른다.

고전주의가, 독재 형태가 수천년의 신화의 성격을 포함한다 해도 반고전주의 형태인 Einstein(연체동물의 시공간)과 Schornberg(12음 조직과 음색 작곡의 형태)는 엄격한 수학적 바탕을 둔 Newton과 Bach의 절대적인 「질서」에 혁명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충분히 멸시되었고, 유태인의 과학이나 문화적 볼셰비키 사상이라 공공연히 비난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유태문화는 자유로운 행동범위를 갖게 한 유태인들의 흩어짐이었고, 반면 절대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땅에서의 종교행위와도 상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결과물)」보다는 치명적인 「영향」을 부산물로 보는 파시스트적 감성에 의해 흔히 추궁당하고 반박되었다.

유능함에 대한 두려움, (무지에서 오는) 어려움에 변화·대처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무지들이 고전주의를 이루는 가히 원동력(?)이랄 수 있다. 유태문화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듯한 비형태적인 힘으로 포함한다. 사람들은 Bergson의 열정의 생명력과 Praust의 자발적 기억으로의 비소설만을 생각하려 할 때가 많다. 그리고 -Heidegger의 비형상화 개념인 Dasein이 확고한 가치를 가졌고, 무섭기까지한 고전풍의 존재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누가 신중히 의심할 것인가. 유랑인들은(Cosmopolitan) 뿌리 깊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몰아내졌고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 묘사는 뿌리가 없음을 매우 구체화 시키고, 변화를 위한 분열의 힘(돈과 이상) 그리고 modernization 그 자체이다.

그렇다. 서양에서의 천재적이고 급격한 변형, 변화의 특징은 항상 유태문화로 의미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히브리 문화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서양사가 만약 끝이 난다면, 그것은 모세와 아론 형제 사이의 원칙적인 싸움으로 가득 찬 얘기들이다. 그 얘기들은 히브리 신의 사사건건(episode)들과 이집트 및 그리스 문화 속에 있는 하나의 우상, 질서, 억압적인 형태 사이들의 투쟁이다.

40년 동안 20만의 서울 도시인구가 폭발적으로 불어나 천2백만으로 될 수 있었던 사회 상황, 그리고 「신도시」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정치 상황들이 우리도 항상 대결의 구도로 역사를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는 끝으로 이런 질문을 해본다. 우리가 아는 모든 형태(Form)는 정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언제 못했던 때가 있었던가…) 空(글/공철)

 

 

Pollari & Somol ①
Korean American Museum of Art(KOMA), Los Angeles, 1995
1995 로스엔젤레스 한미 미술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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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lari & Somol
Robert Somol
시카고의 일리노이즈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대건축과, 도시, 이론에 광범위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콜럼비아, 하버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건축 프로그램에 교환교수, ANY 매거진의 편집인, ARCHEWORKS의 project faciliator로 참여하고 있다.


Linda Pollari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즈 대학에서 건축 석사학위 취득후 동교에 재직중(Adjunct Assistant Prof.)이다. Eva Maddox Associates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였으며, AIA 시카고 지부에서 수여하는 명예상을 수상하였다.

 

 

Ocean ①
Yokohama Intemational Ferry Terminal Competition
Sendai Media Theque
Ebbsfleet International Passenger St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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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EAN
OCEAN은 전 AAGDG의 멤버인 Michael Hensel, Ulrich Konigs, Tom Verebes, Bostjan Vuga 등이 1994년 설립한 모임이다. 그들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의 공개적이고 재결합적인 네트웍을 형성하고, 평형성을 가지고 비평적 간격을 유지하며, 복합적이고 다양한 지속적인 변화와 부단한 성장의 추구를 모토로 삼고 있다.
 
 
 
Psychoanalysis of New Architecture
새로운 건축에의 정신분석학

1. 여유분의 시간에 많은 볼거리와 흥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일어나는 사고나 사건들로 이 사회는 그 심각함 만큼이나 어둡다고들 말한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나오는 것이 「인간」운운하며 감성적인 말을 많이 듣곤 하게 된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정작 중요하고 심각해야 할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둡다.

2. 사람들은 태어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경험된 기억들과 함께 삶 전체를 결정하기 시작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어머니로, 직업인으로 경험한다. 사람들의 이력은, 그리고 여러가지 삶의 기록들은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사회 안에서 같은 code를 갖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이, 떠는 자본이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삶의 「자리」비슷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안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거부」되어 왔다.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어려움이 뒤따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지」와 「법」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법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에 따라 Phallus라고 표현하든, 기독교의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든 간에, 애초부터 부여하는 금지요 규칙인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이는 규칙을 따라서 사고하고, 그 안에서 판단한다. 이처럼 사고를 가능하게 그리고 제한하는 무의식적 바탕이 일종의 표상구조 속에 위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는 말할 줄 아는 도구」라 했다면, 그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그 시대의 표상구조 안에서 생각했고 말했을 것이다. 표상이란 눈을 통해 받아들인 이미지와 관계한다. 그것의 구조란 이미지를 결합하여 조작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제한된 이미지는 특정한 방법으로 사고하게 할 수 있는 틀이며 frame인 것이다.

3. 대부분의 삶이 특정한 테두리 안에서 갇혀 있는 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왜 「어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금지」를 어기려 하는 것일까. 왜 정해 준 자리를 벗어나서 다른 공간에 자신들을 재 위치하려 하는가. 그들은 왜 주어진 표상구조 안에서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그러나 좀체로 벗어나기 어려운 이미 기록된 사고와 활동의 한계를 부셔보려는 금지된 욕망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서 얘기하면 대체적으로 사회로부터 온 「어려움」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4. 욕망은 무엇인가를 산출하려는 의지이고,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기존의 어떠한 질서도 유지될 수 없기에, 그것을 주어진 방식으로, 기존의 질서 안에서 작동하도록 길들이려는 메카니즘이 만들어진다. 표상구조도 일종의 메카니즘이다. 따라서 욕망은 항상 그러한 메카니즘 외부에 존재하고, 표상구조와 항상 대립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 살게 하는가? (국민들에게 항상 주체의식, 주인의식을 갖기를 강조하듯) 주어진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와 그들 감각에게 그 자리를 지키는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주어진 삶에 머물고 자시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것에 만족해서도, 자신의 삶이라고 동일시 해서도 결코 아니다. 차라리 공포 때문이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금지나 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렸을 때 주어진 가혹한 어려움에 대한 공포가 욕망을 막고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스러움」이란 근본적으로 Oedipus적인 관계의 「자연스러움」에 바탕한다. 마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려고 하면 안된다」가 아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전제되는 근본적인 금지인 동시에 그것이 「자연스러움」의 조건이다. 역으로 그것은 「아버지」의 힘과 전능함에 대한 믿음을 축으로 성립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표상구조 안에서의 중심임에 틀림없으며, 그 표상구조는 사람들이 그 안에 머물게 하는 무의식적 「환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한 고전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에 대해, 산에 대해 복종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일깨우며, 그로써 아들의 삶을 지배하려는 구조를 쉽게 받들 수 있다.

6. 사람들이 가끔씩 자신의 「창조주」(아버지 하느님)를 찾는 것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그라면 가지고 있으리라는 「환상」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상징적 공간 안에, 즉 Oedipus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버지의 말인즉, 어떤 어려운 문제는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숙명적인 불가피성을 제공하므로 이해하기 충분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의 아버지는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줄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아버지의 무능, 신의 무능력이다. 단지 무력한 복종과 순종만을 요구할 뿐인 무능력, 여기서 Oedipus적 환상은 무너진다. 주어진 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지니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여전히 최고의 가치이며 숙명적 가치임을 보여주려 하는 것도 아버지나 신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음」은 아버지나 신이 무력함의 증거도, 그것이 더 이상 최고의 가치를 갖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으로 다시 말해 무력함이 드러나는 순간, 아버지는, 그리고 신은 죽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 기대지 않을 것이며, 창조주를 찾아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7.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가치」라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가치 평가를 통해 만들어진다. 「인간」이란 그 가치 평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의 근원이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만물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으로 분할하며, 나아가 인간주의라는 이름으로 비인간적인 것으로 억압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부족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들이 「인간주의」라는 가치의 파괴를 통해 드러난다는 역설은 어떨까.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이전의 모든 가치를 제공하던 근원을 해체하므로 창조되는 새로운 가치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결국 「인간」이라는 요소는, 때로는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 벗어나는 힘이고, 다시 말해「질서」를 벗어나는 행위 자체보다는 벗어날 수 있는 힘인 것이다.

8. 인류 역사에는 메카니즘을 창조하려는 세대가 있는 반면, 그것을 지켜야하는 세대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형태·변화시켜야하는 시대에와 있음을 깨닫는 것은 또 하나의 지식일 수 있다. 그리고 창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라고 믿는 것은 분명 Anti-Oedipus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다. 空 - 글/공철

Karl S. Chu ①
MODAL SPACE
-Towards An Architecture of Possible Worlds
양태적(MODAL) 공간존재 가능한 새 세계의 건축을 향하여

    철학자는 줄 다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그는 현실이나 man of thing가 영구불변이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두가지 속성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 24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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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쥬에 따른면 보편적 역사란 몇 마디의 간단한 비유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것은 내면적인 물리학으로의 쇠퇴와 그 뒤에 이어지는 확장적 물리학으로의 발전이 여러 겹의 궤적으로 그리는 변환과 통합의 역사이다. 고대 신화의 세계로부터 현대 과학의 우주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과정은 유한(有限)이 붕괴하여 무한의 우주를 향해 가는 것을 보여준다. 후대 사람들이 볼 때 아마도 20세기는 형이상학에의 탐구를 유보해 두었다가 나중에야 그것이 보다 큰 것을 계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괸 세기로 비춰질 것 같다. 건축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예수 탄생이래 두 번째로 맞이하는 천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야, 우리는 현실의 진화와 함께 그 일부인 우리 또한 그 속에서 진화한다는 새로운 생각에도 눈길을 돌려 보았는지, 비록 현실은 주어지는 것이라 해도 그 본질은 어느 정도 그 속에서 우리가 참여하여 수행하는 기능이다. 양자 물리학은 참여하는 우주 속에서 관찰자들과 중재적 도구들이 서로 불가분의 의존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최근 역동적인 체제들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혼란스러운 상태들이 확률적으로 작용하여 그 혼란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적 자가조직이라는 새로운 원리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들은 현실 속에 역동적인 참여를 기초로 한 다양한 성질이 있음을 의미하며 현실에는 그 양식(또는 양태)이 되는 구조가 있다 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양태의 기준은 두가지 기본적 개념에 근거를 둔다. 역동적 우주라는 맥락 속에서의 필요성과 (존재)가능성이 그 것이다. 양태 의미론은 「만약‥이라면」과 같은 가정법의 사용을 통하여 발전되어 왔지만 양태적 공간의 실제와 충돌하는 우주는 언어의 표현보다 더욱 크고 방대한 것이다. 양태적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 가능한 세계 속의 건축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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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라는 좀 오래된 질문에 관해 생각해 보자. 혹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옮기자면 그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얼핏 명료하지 못하고 모호해 보이지만 사실상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왜 세상은 이런가」라는 질문은 먼젓번 것보다 좀 덜 어렵게 느껴진다. 그 속에는 우리도 얻을 수 있는 경험이라는 「재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우주란 무한(無限) 물질인 「opeiron」의 구현이라고 이야기한 이래로 무한의 문제는 언제나 존재의 문제와 함께 대두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의 유형을 실제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두가지로 분류한다. 실제적인 무한이라고 했을 때 무한이라는 개념은 뒷걸음질하여 위대함만이 끝없이 이어지게 되므로 이것은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집합 이론과 무한에 관한 현대 수학적 개념을 확립한 조지 칸터에 따르면 그는 잠재적인 것에 대립되는 개념인 실제적 무한들 속에 종적 순위가 있다고 가정한다. 무한에 관한 이러한 집합 이론적 개념은 수학의 확립 시기에 제기된 문제들과 관계가 있으며, 양태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제외하면 메타 수학 이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이야기되는 일이 없는 주제이다. 우주는 무한한가? 존재 가능한 세계는 무한히 많은가? 논리적이고 탐구적인 이들 질문들은 건축에 관련된 담론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기실은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사고와 관련된 것들이다.

 

 

X Kavyas
Karl S. Chu
1950년생. Houston 대학을 졸업하고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건축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휴스턴의 Kinetic System, 캘러니아의 Flood Meyer & Assoc, James Heaton&Assoc.를 거쳐, 1989년 X Kavya를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 홍콩, 중국 등지의 대학에서 강연회를 가졌으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SCI Arc Gallery(1993), 시카고의 일리노이즈 대학 등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전시, 출판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James Williamson ①

    STATIONS
    요전번 나는 내 세계만의 전리품으로 쓸 작은 물건과 동물들을 찾느라 Temuco의 우리 집 뒤를 헤매다가 옆집 담장의 말뚝에 옹이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니 우리 집과 모양이 아주 비슷한 땅이 보였는데 더없이 황량하고 온통 쓰레기뿐이었다. 희미하지만 뭔가 불안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손이 하나 나타났다. 내 또래 꼬마의 손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손은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엔 예쁜 하얀색 양 하나가 놓여있었다.

    정체모를 양털로 만든 장난감 양이었다. 달려있던 바퀴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보다 더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동물은 없었으리라. 옹이 구멍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바로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 소중히 아끼던 솔방울이었는데 반쯤 벌어져 있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것을 놓아두고 나서 작은 장난감 양을 갖고 그곳을 떠났다.
    - 파블로 네루다 「장난감 양, 솔방울…」

    처음 이 책은 Borges에 있는 글로 시작하여 웃음을 자아내지만, 글을 읽어감에 따라 이제껏 내 사고의 길잡이가 되어주던 것들을 모두 산산이 깨뜨린다. -「내」사고라기보다는 「우리의」사고로서,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대체적 모습이 갖는 특징이 지속되도록 지탱해주는 사고일 것이다.- 그리하여 익숙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우리에 맞도록 고쳐 만든 정돈된 표면과 평면들을 전부 깨뜨릴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에는 「같은 것과 다른 것」사이의 오래되고 익숙한 구분마저 휘젓고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한다. 이 글은「어떤 중국 백과사전」을 인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⑴황제의 것, ⑵향기나는 것, ⑶길든 것, ⑷빨아대는 돼지, ⑸양서류, ⑹전설 속의 동물, ⑺길 잃은 개, ⑻현재의 분류 속에 속하는 것, ⑼미쳐 날뛰는 것, ⑽셀 수 없는 것, ⑾아주 가느다란 낙타털로도 끌어당길 수 있는 것, ⑿기타 등등, ⒀지금막 물통을 깨뜨린 것, ⒁멀리 떨어져서 볼 때 날파리같은 것.」이러한 분류법이 주는 놀라움 속에서 우리가 이것을 단숨에 비약시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또다른 사고 체계가 우화를 통해 던져주는 이국적인 매력으로 비치는 것은 우리들의 한계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M. Foucault 「사물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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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교환의 벽」으로서 기능하는 벽이나 담장을 쌓을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기억을 살리고 화해를 이루는 도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에 의해 세워져야 하는 아이들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체계적인 의도를 갖고 파블로 네루다의 「장난감 양, 솔방울…」을 따른다. 여기에 보이는 콜라쥬와 드로잉, 사진들은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행해진 워크샵 기간 중에 이루어진 그러한 작업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소는 복잡하다. 그곳은 도시,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라진 도시」로서, 사라예보든 디트로이트든 그 도시에서는 존재의 흔적조차 소멸, 상실되도록 하는 것이 건축의 주된 「실행(practice)」-청소로서의 실행- 방식이 되는 것이다. 즉, 다음 하퍼 리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다음번 세상을 걱정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거리를 내려다보라.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James Williamson
런던의 Architectural Association에서 수학하고,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건축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건축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수의 수상경력과 출판을 통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Georgia inst. of Technology, Rice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었고, 현재는 Visiting Assistant Professor로서 하버드 대학 Graduate School of Design과 뉴욕 Cooper Union에서 활동 중이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9/psycho.html ]

Views of the Observer: Dubbeldam, Diller+Scofidio
관찰자의 관점: 더블덤, 딜러+스코피디오

건축이 거주와 보호를 위한 공간을 창조한다기보다 개체들의 물질적 및 비물질적 흐름의 형 태를 잡는 작업에 가까워졌다고 한다면, 이번 호「공간」에서 묘사된 두 군데의 건축 사무 소는 가장 혁신적인 실천가들로 꼽힐 것임에 사용하는 재료에 있어서 각각 서로 다른 양상 을 보이긴 하지만, 윙카 더불덤과 엘리자베스 딜러 앤드 리카르도 스코피디오는(이하 딜러+ 스코피디오) 모두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이고, 자기성찰적이면서도 즐거운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더불덤이 조각가의 손길과 이론가의 정신으로써 금속과 유리, 콘크 리트, 플렉시글라스와 아세테이트를 다루고 모양을 잡아 아름답고 혼돈을 정리하는 건축과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반면, 딜러+스코피디오는 그 어떤 열성적 프로이드파 정신분석학 자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분석적인 기술로써 관찰자적 편향성을 지닌 일련의 건축적 장치 를 만들어내어 이 장치들로 건축물 자체의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탐구하고 형성한다.

윙카 더블덤의 이론상 관심사는 주로 방대하고 압도적인 텔레마티크의 흐름에 있다. 더블덤 은 초기 자신의 도발적인 GRAUZONE도시 프로젝트에서 「검은 돈」의 비물질적 흐름이 국제적 「암시장」에서 방향을 선화하여 다시 재정립되어야만 국제 경제의 공식적이고 합법 적인 체인 속에 비공식적이면서도 합법적인 「검은 체인(Black Circuit)」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용적 재고찰은 당황스러울 만큼 복잡한 불법 경제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경제 혼란, 즉 경제 문화의 자유지대를 초래할 것이다. 더블덤의 프로젝트가 들 어설 부지는 로테르담에 있는 비에르하벤 항(港)으로서 그녀는 이곳에 살아있는 얇은 다용 도의 막「grauzone」을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이 grauzone은 검은 체인 안에서 순환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고 살찌운다는 것이다. 더블덤은 다른 도시 프로젝트의 물질적 및 비물질적 흐름 중에서도 이와 유사한 다른 이슈들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중에는 일본의 요코하마 항만 터미널을 위한 DIS-A-PIER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공모전 데뷔 작품이다. 흐르는 도시의 중심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더블덤은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수 직, 수평으로 엇갈리게 꼰 끈들을 사용하여 터미널과 도시 사이의 교통의 흐름을 한데 엮어 내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2D-4BX로서 이것은 레바논 베이루트의 수크 개발을 위한 더 블덤의 프로젝트이다. 2D-4BX는 서로 종종 충돌하는 역사적, 지질학적, 문화적 재료들을 늘어 놓고 서로 엮어 짜서 엄청나게 복잡한 형태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에서도 가장 격동에 휘말라는 도시의 중심부가 새로운 세계적 도시로서 등장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하였다. 뉴욕의 국제 연합 건물을 증축하기 위한 프로젝트 UN-X는 정치적, 물질적 관 절 부위를 시험하고 국가와 초강대국들의 일그러진 관계를 시험한다. 이 프로젝트는 매끄러 운 모양으로부터 선 모양의 홈으로, 그리고 다시 매끄러운 모양으로의 변화를 겪는다. 문화 유물 보관소를 위해 제안한 「임의의 접근(RANDOM ACCESS)」의 표면적 부지는 파리의 외곽 지대이며, 이 프로젝트는 부지와 문화적 유물을 액체 표면과 땅 바깥의 분위기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일종의 지하 지대로 바꿔 놓음으로써 현실과 정보, 물질과 비물질간을 갈라놓는 선을 부순다.
모자브 사막의 도시 프로젝트인 생물연구소(BIO-LAB)속에서 도시와 후기도시(포스트시티) 는 형식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해체되고 재건설되어 인공의 환경을 만든다. 이 환경은 사막 과 인공적 하부구조를 한데 엮어 자연 속의 생명의 기원을 연구한다는 궤변적 목적을 갖는 다.

그러나 더블덤의 작품의 진정한 범위를 가장 잘 알려주는 증거는 이미 세워진 세 개의 프로 젝트들이다. 이들은 모두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연결과 레이어링의 도구로써, 핀을 창의적 으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로테르담예술 아카데미의 입구를 다시 디자인하는 과정 에서 길고 단단한 금속 핀들은 유리판과 돌의 표면을 마치 조각처럼 한데 묶어 차단장치를 만들며, 이 장치는 원치 않는 빛과 교통의 흐름을 걸러내는 데 사용된다. 뉴욕에서 최근 완 공된 그녀의 크리스턴로즈 갤러리에서도 핀들은(개인의 신분증 번호) 지켜보는 사람들과 전 시된 작품 속에 관찰 관점의 레이어링을 그려낸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이 레이어링들은 모 든 것을 가로지르고 뒤집어 놓으며 뒤죽박죽을 만들어 마침내는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 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더블덤은 보다 큰 규모의 도시적 사색과 좀더 조각적인 관심사 를 연결해주는 도구로 핀을 사용하여 물질적, 비물질적 흐름을 지닌 건축물인 로스엔젤레스 폼 제로 갤러리 속에 날줄과 씨줄을 장치했다. 이들은 이미지를 본문처럼 암호화해 만든 아 세테이트 조각의 형태를 취한다. 그 이전까지 그녀가 작업한 프로젝트들은(위에서 언급한 모든 프로젝트들을 포함) 이제 모두가 디지털화하여 굉장히 큰 아세테이트 필름 조각으로 변화한다. 이렇게 모든 프로젝트와 조각들을 한데 합쳐서 꼬아 만든 건축적 필름 조각들에 는 「짜임(CONTEXTUR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절묘한 아세테이트 조각들은 벽이 지니 는 전통적 물질성과 플렉시 글라스가 지니는 관념적 비물질성 사이의 어느 곳인가에서 고정 핀 위에 떠 있었다. 이 아세테이트 조각들은 갤러리에 찾아온 사람들의 몸을 꿀어당겨 그들 을 평행한 정보의 흐름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지닌 인공적 형태의 반향을 건축을 흐름과 인 간적 정보의 흐름 사이에 세워두어 건축적인 의미의 끼여들기를 행사했다. 관찰자들은 그들 자신의 정보 조각을 형성하고 이 정보 조각은 마치 광대한 영사기의 내부 메카니즘 속을 후 비고 끼어들어 가는 필름처럼 아세터이트와 함께 모델과 벽 사이로 끌려들어갔다.
그러나 폼 제로 갤러리에서 이미지들은 외부 스크린 위로 표출되지 않았고, 그래서 정보적 건축 장치의 일부가 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이미지들은 내부로 표출되었고 각각의 조각들 은 자신의 속도대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하며 흐르는 건축 영화를 창조했다. 이 내 부로의 표출은 마치 영화처럼 보는 이들을 로스앤젤레스의 폼 제로 갤러리 밖으로 옮겨서 베이루트와 로테르담, 파리, 뉴욕, 그리고 모자브 사막의 지질학적 움직임 등으로부터 미국 의 신속하고 분주한(자동차와 정치의 흐름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얼룩까지에 이르는 다른 지역들에까지 데리고 갔다. 그리고 파리와 우주 저 바깥 위성이 있는 곳과의 사이 어딘가에 서 일어나는 순간적 정보 전송에까지도, 갤러리의 이러한 조각의 흐름이 완성되고 보는 이 가 다시 다른 건축적 지시에 따라 로스앤젤레스의 고속도로 위로 몸을 굽히고 나면, 이들은 세계적 수도의 순환적 흐름 속에서 얼룩과 순화, 핀들, 그리고 가느다란 조각들로 재형성된 다.

딜러+스코피디오는 최근 간행된 자신들의 저서「肉:건축의 탐사」에서 『이상 성격자들은 선을 넘는다』라고 썼다. 무엇이 안에 있고 무엇이 밖에 있는지, 무엇이 그의 것이고 무엇이 그녀의 것인지, 우리가 누구이고 그들이 누구인지 하는 것들을 결정하는 제도적인 선을 긋 는 데에 건축은 언제나 하나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딜러+스코피디오는 이 러한 선들을 주요 건축 재료로 삼아 마치 건축상의 이상 성격자처럼 이 재료들을 잡아당기 고 구부리고 꼬아서 새로운 건축 임지를 형성하는 새로운 시각적 선을 만든다. 많은 전문 건축가들이 건축과 다른 행위를 구분하는 선을 표시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이 선들을 지운다 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딜러+스코피디오는 직교하는 건축의 선들을 다시 접어서 전통적 건 축믈들처럼 건축학적인 수행(遂行)의 금을 그었다. 건축 계약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 는 일은 여전한 건축적 문제이다. 딜러+스코피디오는 최근들어 유행처럼 모두들 뒤틀린 형 태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구들을 무시하고 건축 행위 자체를 비틀어서 건축의 예시 가능성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한 상을 제시하며,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해체주의 건축가들 덕분에 잘 알 고 있듯 형태가 꼬이고 비틀린 낯익은 이미지들을 얻는다. 딜러+스코피디오는 해체를 통해 우리가 아무리 순진한 겉모습을 하고 있어도 늘 성(性)에 따른, 그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관 계들 속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 우리는 건축 행위에 관계할 때는 항상 선을 긋거나, 선이라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데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배웠다. 사실 우리는 딜러+스코피디오가 새로이 그은 선들 위에 이름을 써넣고 나면 불편한 뿐 아니라 - 그들이 올 봄 독일의 「포럼」지 특별호에 실린 저 유명한 「제4의 창」프로 젝트 광고에서 「편안함」이라는 것에 관해 밝힌 바와 같이 - 종종 고통스럽고 파괴적이기 까지 한 건축 계약 관계에 얽혀 버린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면 딜러+스코피디오는 그들의 「나쁜 압력」프로젝트에서 건축이 이제까지 性의 선 과 장벽들을 만들고 길들이기 위해 도맡아온 규정적 역할을 강조한다. 「나쁜 압력」은 가 정 경제에서 여성이 전유하곤 하는 집안 일이 사실상 건축사의 문제라는 주장을 편다. 이 프로젝트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미칠듯이 심각한 셔츠 다리기 매뉴얼로서 「천을 빳빳이 펴서 셔츠의 등 부분을 다리미판 위에 올려놓아라」라는 간단한 지시로부터 시작된다. 1962년의 가정일 하는 법에서 따온 이러한 지시들은 남편과 가족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을 만 들기 위해 여성이 맡아온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이다. 지시가 늘어가면서 (리즈 딜러가 종종 그렇듯이 깜짝 놀랄 만큼 즐겁게 큰 소리로) 빳빳이 풀먹인 비즈니스 셔츠의 반듯함에도 접고 꾸긴 자국이 늘어간다. 결국 「나쁜 압력」은 옷 다루는 일에 관하 여 한쪽 성에 치우친 가정일의 논리를 shizophrenic 한 극단으로 밀어냄으로써 새롭고도 심 술궂은 논리를 출발시킨다. 이 논리에 따르면 다림질은 긍정적 창조 행위로 변형될 수 있으 며, 딜러+스코피디오가 일찍이 언급한 대로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죄수복을 접고 다림질하는 것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들을 재교육하는 체계로서 힘들여 고안한 시스템인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새로운 논리는 지난 몇 년간 딜러+스코피디오가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통하여 발전 시킨 비밀스런 분위기의 중요한 건축물들에 적용시켜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점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중요한 건축물이라고 해서 친숙함을 없앨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건물은 친숙함 덕택에 현상 유지를 할 수 있고, 그 후에야 방심할 수 없게 변하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다른 것과 의견을 달리 하는 건축물은 비밀에 싸였다는 점이 특징이며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건물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것은 구축된 몸체와 공간 위에 작용하며 자 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모든 법칙들을 변형시킨다(「肉」,39). 』

몰론 이것이 딜러+스코피디오가 샌프란시스코의 예술가 데이빗 아일랜드의 집(「후퇴하는 방」이라는 프로젝트에서)과 뉴욕 현대 미술관의 모더니즘 주택(「기생 생물」이라는 프로 젝트에서)을 맡고, 가장 중요한 집들 혹은 제2의 주택이나 별장 등 집 형태를 갖춘 미국 실 험주의 건축물을 도맡게 된 정확한 이유이다. 사실 별장, 특히 뉴욕 롱 아일랜드의 별장에서 는 언제나 일반 주거용 저택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종의 실험이 허용되어 왔다. 딜러+스코피 디오는 제2의 주택이 「제2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느린 집」 에서 살펴본 것도 이러한 외면의 자유이다. 「느린 집」은 롱아일랜드의 햄프튼 가문을 위 해 디자인된 제2의 주택으로 아쉽게도 실제로 건축되지는 못했다. 「느린 집」에는 그들의 다른 작품과 공통적인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점이 많이 있지만, 이 프로젝트가 20세기 말에 더 잘 들어맞는 생화 이미지가 된 것은 텔레비젼과 자동차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담당 하게 된 역할 때문이다.
딜러+수코피디오는 정면이 없는 집을 문으로 표현했는데 그 문을 열면 창문이 곧바로 나타 나게 된다. 문 속으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들어가는 동안 텔레비젼 모니터가 설치된 창문이 실감나게 시야를 넓혀주고 우리가 가진 무한에의 욕망을 배가시킨다. 「느린 집」은 자동차 가 있는 도시로부터의 여행길로 시작하여 자동차와 영화의 산책으로 바뀌고 자동차가 목적 지인 롱아일랜드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자동차에서 본 전망을 조성해주는 재료가 된다. 목적지에 도착한 관찰자는 자동차를 안쪽으로 몰고 들어가 「감속의 길」이라 명명된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며 바닷가 관찰자가 12도 정도의 경사로를 따라 점차 빨리 움직여 나가 서 집 앞에 서면 외부 카메라에 부착된 비디오 모니터와 대형 창문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보이게 된다. 카메라가 아름다운 바닷가의 경치로부터 비디오를 한컷 한컷 찍어 와서 그것 을 화면 속에 재생시키면, 자연 그대로라면 화면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이 비디오 에는 어떻게 찍혔는지 하는 영상간의 관계가 문제로 떠오른다. 놀랍게도 그들은 역설적으로 바닷가의 두 가지 광경 모두, 그러니까 비디오의 영상과 창문 속에 보이는 영상이 전부 무 언가를 매개로 한 부자연스러운 영상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창문에 보이는 광경은 어떠한 매개체도 없는 자연스러운 영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님을 모 두가 알고 있는 비디오의 영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것이 힘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한 영상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적이고 진실하 며 가공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딜러+스코피디오는 건축물 자체의 테크놀러지 도 그렇게 분석한다. 그들은 건축물이란 결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진실된 광경을 형상화하고 구축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딜러+스코피디 오는 과감하게 그리고 매력적이며 비할데 없을 만큼 뻔뻔스럽게도 건축에 대한 우리의 관점 을 재형상화시키고, 그러는 가운데 20세기 말 가장 흥미롭고 압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글번역/김근희)

 

 

Winka Dubbeldam ①

ART ACADEMY ROTTERDAM, HOLLAND

A design for the Entrance Zone of the Art Academy in
Rotterdam, 1990

네덜란드 로테르담 아트 아카데미
1990 로테르담 아트 아크데미의 입구 부분을 위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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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아트 아카데미가 들어선 건물은 1930년에서 1934년 사이에 지은 건물로 델프트 스쿨의 일원인 A. J. 크로펠러가 디자인했으며 이전까지는 「Mees en, Zonen」이라는 은행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이러한 스타일의 진정한 대표자이다. 세부 처리가 잘된 이 벽돌 건물 은 은행을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 안에 보관된 현금이 안전하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0년 아트 아카데미 교장은 입구 부분을 새로 단장해서 좀더 적절하고 개념적인 방식을 통해 이 건물의 새로운 기능을 표시하기로 결정했다. 부가적으로는 이 부분의 경비원이 있 는 부분에 좀 더 보안 시설을 강화하고 조명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초기 전략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 천장과 벽면에 너무 많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을 없애 벽돌 몸체와 채광 유리창의 아름다움이   돋보이게 한다.
- 부가적 필요 요소들은 기존의 구조물과는 분리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건물에 층층이 쌓여 있는   시간의 흔적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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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트

다음의 요소들이 덧붙여져야 한다. 강철 스크린이 건물 정면에 놓이고, 유리 스크린이 경비 실 안에 설치되어야 하며, 외면과 내면을 연결하는 조명들이 필요하다. -강철 스크린- 정면이 큰 데 비해서 예전의 입구는 작고 어둡게 뚫려 있었다. 새로 설치한 스크린은 내면을 따라 밖의 정면으로 나오면서 공간의 높이를 두 배로 높여 도시 속에 새로 움을 던져준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는 아치형의 작은 입구와 둥그런 구멍이 감싸여 있는데 스크린은 현 건물의 외관을 따라 펼쳐지며 그것을 변형시킨다. 스크린 뒤의 둥근 구명 속에 는 네온등을 설치하여 밤이면 역사의 발자취와 옛건물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게 했다. 낮이 면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와 통행인들로 네온 불빛이 조각조각나고 강철 패널은 도시의 불 빛을 반사해 낸다. -유리 스크린- 메인 로비에는 두 개의 커다란 판유리가 줄지어 서 있다. 하나는 전화하는 사람의 사적인 통화 내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비원의 보안을 위한 것이 다. 유리 패널은 스테인리스 스틸 핀에 의해 벽에서 떨어져 있다. 경비원과 의사 소통을 하 기 위해서 유리 패널 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이러한 장벽은 청동의 느낌을 주는 나 무 받침대가 구멍 속으로 고개를 내밀게 함으로써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스크린 뒤에는 강 철 데스크가 있다. 커다란 구멍들이 나 있는 이 강철은 경비원이 사용하는 참나무 작업대를 숨겨준다. 이렇게 겹겹으로 놓인 사물들은 완벽한 보안과 모든 면에서의 투명성을 동시에 제공하여 준다. -빛의 선- 빛은 입구의 홀과 메인 로비를 통하여 외부의 스크린을 전시홀과 연결시켜준다. 그것은 비틀린 스테인리스 스틸 판들로 되어 있는데 이 판들은 강철 끈이 달린 놋쇠피팅된 위쪽의 강철 빔에 매달려 있다. 이 선은 둥근 돔 형식의 천장과 아래쪽의 작고 튼튼한 빔들 위에, 그리고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부드러운 빛을 던져준다.

 

Elizabeth Diller
Elizabeth Diller는 폴란드 태생으로 Cooper Union을 졸업했다. Cooper Union, 하버드, 콜 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Ricardo Scofidio
Ricardo Scofidio는 뉴욕에서 출생하였고,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Cooper Union 의 교수이며 하버드와 일리노이즈 대학의 Visiting Professor로 있다.

 

 

Diller+Scofidio ①

BAD PRESS

Installation at the Centred'Art Contemporain,
Castres and Richard Anderson Gallery, New York, 1993

나쁜 압력
1993 뉴욕 캐스터즈 앤 리처드 앤더슨 갤러리
현대 미술관에 장치

개체의 역동적 에너지를 공장 안의 효율적 노동력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과학 경영 이 1910년대쯤에는 가정과 집안일에까지 도입되었다. 시간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는 본래 이 상적 형태의 움직임을 디자인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상적 노동자를 디자인할 목적으로 공장 노동자의 행동 하나 하나를 분석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었는데 이상적 주부를 양산하기 위 해 집안일에 소용되는 움직임 하나 하나를 자세히 조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노동력 절 감 기술의 응용은 새로운 「전기적 하인」이라 할 가정 기구와 결합하여 주부의 신체적 소 모를 막고자 했다. 「효율성」의 논리 전개상 이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덜었을 때 여성은 가 정에서 해방되고 그럼으로써 대가를 받는 노동력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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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효율성에의 길은 해방의 약속을 기키지 못했다. 효 율성은 종종 목적 그 자체로 생각되곤 했다. 역설적으로, 청결에 대한 기준과 기대감이 강제 적이다시피 할 정도로 상승하여 오히려 여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일이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 오늘날 집안일이란 주로 먼지를 없애고 매일 집안을 정리하는 일들로, 경제적 산업 윤리에 의해 조직되고, 원래는 능률을 중시하는 기계 기술자가 고안해 냈던 메카니즘 경제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예를 들어 다림질하는 작업은 미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소의 원칙에 지배받는다.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최소한의 평평한 두 면을 통해 셔츠의 모양을 다 시 잡고 최소한의 공간을 낭비하는 이차원적 단위를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다. 이 셔츠를 입 었을 때는 최소한의 주름이 생길 것이다. 남성의 셔츠를 다림질하는 패턴은 기준화되어 있 어서 셔츠를 직각의 보관 시스템에 경제적으로 잘 들어맞는 직사각형으로 되돌리는 일은 습 관화되어 있다. 생산 단계에서, 공장에서는 다림질한 셔츠를 살짝 펴서 사각형의 종이상자에 넣고 이 상자는 입방체 모양으로 트럭 위에 얹혀 소매상으로 운반되며 소매상에서는 이를 사각 진열 케이스에 넣어 셔츠의 직사각 형태를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판매된 후에는 가정 의 옷장 선반이나 서랍장 속에 보관되었다가 여행을 갈 때면 여행 가방 속에 넣어져 집을 떠난다. 이러한 매 단계마다 셔츠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을 갖는다. 셔츠를 입으면 직각의 효율성의 논리의 잔재가 몸의 표면에 남아 있다. 잘 다려진 깨끗한 셔츠의 평행한 주름과 네모난 모서리는 세련미의 상징이 되고 있다. 효율성을 쫓는데서 나 온 부산물은 욕망의 새로운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다림질하는 작업이 효율성의 미학으로부 터 자유로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다림질의 효율성은 「기능적」이미지와 「역기능 적」이미지가 교차됨으로써 후기 산업체를 상징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나쁜 압력」은 일반적인 행도 양식에 일치하지 않는 다림질을 나타낸다.

 

 

Winka Dubbeldam
Winka Dubbeldam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콜럼비아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ARCHITECTIONICS의 대표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10/views.html ]

When We View Architecture
건축을 바라볼 때

첫째로 필자가 Design을 고려할 때, 우선시 하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여태 써 온 글들이 쉽게 생각하여, 학구적인 노력에 의해, 또 그 성취를 위한 하나의 건축 이론을 피력한 것이라 생각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필자 자신은 순수 학문적인 성취나 완성을 믿고 있지도 않은 듯하다. 되려 모든 건축 이론과 역사는 항상 「객관성」이란 베일에 쌓인 채, 그리고 발표자의 의도에 의해 항상 수정·조작된다고 생각하고 적절한 반증이나 사실적이고 충실한 이론이나 역사라 할지라도 「써비스 차원의 Design」을 위해 또 한번 수정· 조작된다고 믿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Design에 대한 관심을 간략하게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Design 과정」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많은 건축을 살펴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건축 project와 text 자체들이 지적인 듯, 정신적인 듯 하다가도 결국 전통적인 모든 건축적 감각에 아부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러한 건축적 파산 상태임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실망감 내지 허무감을 필자보다 더 또는 덜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 대다수가 이러한 파산 상태는 건축이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경제적·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이런 힘들이 예술이나 문학 그 밖의 것들에 해왔던 것처럼 건축을 또 보잘 것 없이 만들어 버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독자들 중에는 아마도 이러한 예는 하나의 단편이고, 대개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만약」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요소들이 근본적인 문제 덩어리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흔히 폐암으로 죽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사인은 가벼운 폐렴에서 시작함과 비슷하기 때문에, 넓은 범위의 문제를 예측할 수 없다면 언젠가 정말로 건축을 장사 지내는 일이 닥칠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use」를 위한,「Fashion」이나 「상업적」인 메카니즘 속에서 경시해도 될 만한 것이고 건축의 다양성에 대한 장점을 소홀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Design의 빈곤상태는 Design적 형이상학에서 (여전히 고인돌 시대의 단어 「형이상학」을 의미있게 쓰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언급 할 수 있는 상상력의 부재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건축을 사회구조적으로 그 사용을 목적으로 그 평범함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상황에 항상 놓여 왔던 것이다.
한가지는 분명히 밝혀야 겠다. 필자가 오늘의 건축에 많은 실망감을 토로하는 것은 어떤 증 거들을 통해 이러이러한 건축이 쓸모 없거나 추하다는 것을 밝히려함이 아니다. 또 그렇게 할 수 도 없는 이유는, James Stirling이나 Hans Hollein, 그밖의 훌륭한 건축가들을 통해 만들어진 많은 건축은 필자의 실망감과는 상반되게, 꽤나 쓸모도 있고, 아름답다. 그러므로 여기의 주된 논의점들은 건축의 실패에서 오는 실망감보다는, 여태까지 성공적이었기에 오 는「실망감」임을 말해둔다.

그렇다면 이해를 돕기 위해 성공적인 결과로 얻는 실망감의 예를 들어야 겠다. 일반적으로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학교, 병원, 정부 등등의 제도기관들이다. 이들 나름대로는 100∼200년을 거치면서, 보수적 의미로써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성공적이었다고 긍정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현실사회와 멀어져가고 (그들이 말하는 개혁을 두 세번 하더라도)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감당하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몇몇 국가의 황실 중에 (구조적인 측면에서) 영국을 생각해 보자. 엘리자베스 여왕, 챨스 왕자, 그리고 마치 그들을 위한 상·하의원들은 진정으로「인간적」인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우러러 동경할 만한 대상이며, 무척이나 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가능한한 진정으로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귀함 내지 귀족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왕실 구조의 개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간직한 듯한 귀족성, 유전적으로 평민보다의 탁월성, 권력에 대한 권리로 집약해서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나마 그들이 보여주는 언행들은 그렇게 까지 순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주 세련 된 지식이나 지혜를 보여주지도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마치 골동 품 감상 해왔던 화려한 왕실을 쉽게 뿌리채 지원 버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마 그들의 외형, 화려함, 영국 황실의 상황들을 즐겨 볼지도 모르겠지만 왕실 구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모순들, 또 지지할 수도 없는 상황들이 필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대개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의 건축 현실과 유사하다. 어느 그럴싸한 건축적 사색이, 마치 귀 족과 같이 오늘의 건축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됐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가면을 쓰고, 안으로는 비열하고 헤게모니의 얼굴을 한다면 전혀 엉뚱한 방향의 건축으로 간다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버리는 방법을 빼고서는) 이러한 견해에서 챨스 왕자가 요 몇년사이 보수적인 건축으로 개종하다시 피 전념했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축」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건축」과 관련없는 건축을 간직하기 위한 실행이랄 수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간략한 생각들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 방향의 가능성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Hegel의 「Aesthetic」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건축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완성되었기 때문에 건축의 본질은 현실 속에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부적절한 것이 되버렸다. 「건축의 형이상학적 완성」▼1을 충족하기 위해선 「발견」이 필요하며, 특히 스스로의 발견 과정이 중요하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모든 개개인과 문화의 구조는 오래전부터 확실했던 「건축론」에 종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계속적으로, 창의적으로 개인과 문화 의 구조 속으로 이동하는 건축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건 축」이 이제는 새로운 주제나 방향을 만들 수 있는 주요 문화 도구도 아니고, 문화나 개개 인의 발전에 직접 상관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Nietzsche의「Dawn」▼2에서 그 리고 그의 일련의 작품에서도 암암리에 말하듯 오늘날 건축의 Design 힘이 쇠약해져 가더 라도, 이 보다 더 큼 세력을 가진 어떤 강한 힘에 조작·수정되어 왔다. 더불어 Marx, Freud, Heidegger, Derrida 등에 의해 말해왔듯 이러한 힘들은 근대 주요 담론들을 규정할 만큼 이론화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담론들이 서로 뚜렷이 다른 사고적· 언어적 공간에 상관없이 그것들은 하나의 상수체계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모든 주요 원칙은 다른 모든 관찰과 사색을 바탕으로 한다는 분명한 가정(assump- tion)이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들이 미약한 힘으로도 근근히 사회에 제안하고, 보완 할 수 있는 vector가 될 수도 있었다.

1- G.W. Hegel, Aesthetic, 영문번역으로 Hegel, The Philosophy of Fine Art, New York, 1975. 「형이상학적 완성」이란 필자에게도 무척 복잡하고, 어떻게 짧게 표현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이 Hegel의 주요 사고를 건축적인 견해로써 밝히고자 함이 아니므로 관심있는 독자들의 노력으로 생각해보길 권한다.
2- F. Nietzsche, Daybreak, Thoughts on the Prejudices of Morality, Cambridge. 1982


우리는 몇 년 전부터 John Hejduk, Peter Eisenmann, Daniel Libeskind 등등의 작품을 분 석·관찰할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건축 가정들은 서로 스타일도, 건측적 자세 도, 미학도 다르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Design은 건축이 무엇「일까」라는 당연하 고도 근본적인 문제들을 계속 생각해왔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작은 그룹의 건 축적 사색이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의 작품은 부적절한 건축의 발전에 대항하여 지난 20년을 진지하게 토론해온 결과임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며, 건축을 바라볼 때 중요점이다.

그리고 위의 주제와 관련하여 「비평」이란 것도 짧게 생각해봐야 겠다. 필자는 건축을 관 찰할 때, 건축 Design의 중요한 doctrine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그 작품이 명백히 건축의 성실성에 기초했으나, 항상 번복될 수 있고, 타협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래서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적당한 Design이어야 한다. 만약 오늘날 건축 Design이 갖는 공허함이 이러한 기초적인 전제도 인정하지 않은 결과라 고 본다면 흔히 알고 있는 비평이란 것도 건축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기에는 부적당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또 만약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진정한 문제는 「예」(good case or bad case)를 제대로 조사·관찰하지 않는 무지와 무식 그리고 이제 재능이 바닥나버린 결과라고 한다면, 이럴 때 비평은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라 생각한다. 이렇게 얘기한다 해서 이 글에서 우리의 건축 현실에서 바라볼 때, 비평의 필요 여부를 가 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배 건축가들의 정성과 노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는 필자가 항상 제안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점은 지적·기술적·재능적 건축이 태동되는 때이며, 이것이 절정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이 시점의 건축적인 문제들이 건축의 기초적인 생각이나 관념에 있다면 비평이란 것은 항상 그 관념에만 관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필요한 작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건축이 사회 현실과 약해만 가는 상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실험은 비평보다는 한 차원 깊은 차원에서 조절, 연구되어야 한 다. 이 말은 건축 Design 이론 차원에서의 고찰, 연구라 하겠다.

 

 

Homa Fardjadi - Mohsen Mostafavi
①COLLAPSED SPACE
무너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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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의 모빌 시를 위한 지역적 건물의 이「모델」은 뭔가 유추해낼 수 있는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여러 물질들의 조합으로서의 건물 외부와 건물 내부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보려고 한다. 제시된 건물이 인식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이 모델을 만드는 작업은 건물의 이미지를 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영향들을 타진해 보기 위한 것이다. 에밀 뒤르켕은 이 상징적 차원이 암시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표현은 단순히 현실의 이미지나 우리에게 제시된 둔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위에 유기체적이고 정신적인 현상들의 거친 소란을 불러모으는 힘이다...」(사회 속에서의 노동의 분할 97, 일리노이 글렌코 프리 프레스, 1981)

그러나 현대의 공공 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는 최근의 예들을 보면 상징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의 두 극단 사이에서 갈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단순한 현실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면서「공상 혹은 기초 서술적 구조」의 영역은 타진해보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프레데릭 제임슨에 따르면 이것은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인데도.(정치적 무의식, 48, 뉴욕 이타카, 코넬대학 출판부, 1981)

마이클 헤이즈에 따르면 모빌 시를 위한 지역적 건물의 모델은 「목적을 겨낭한 하나의 과정의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과정과 계획, 추진, 그리고 건축적 연장(延長), 그리고 그 결과 산출되는 효과를 재어 보려는 태도이다. 이 모델과 무너진 공간의 재(再)묘사를 통해 전형적이고 실용적이며 중간 수준의 건축적 요소들인 벽과 천장, 칼럼 그리드, 층계들을 압축하는 것 이상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이 모델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기능성의 다이어그램과, 각기 다른 형태와 기능, 내용, 표현들을 위한 투명 양화 혹은 분배 장치, 그리고 같은 기준선상에 있지 않은 (어떤 활동이 하나의 형태를 갖춘다기 보다는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건축적 기록들에서 나온 표현들을 하나의 조직 속에 압축하여 모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갤러리들의 수직적 평면은 그 분배의 구체적인 신호가 된다. 이것은 점유하는 행위를 목격하는 한편 그 행위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상세히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물리적 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은 이제까지 미처 사용되지 못했던 어떤 관념상의 근육을 구부려야만,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일반적으로 연관짓지 못한 채로 놓아두었던 가능성들을 불러모을 수 있을 것이다.」■

 

 

Homa Fardjadi
Fardjadi-Mostafavi Associates의 파트너로 런던의 AA School과 Pennsylvania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고, Harvard 대학 GSD, Eero Saarinen의 건축학과 교수이며, 활동 중이다.


Mohsen Mostafavi
Fardjadi-Mostafavi Associates의 파트너, 런던의 AA School of Architecture의 의장, Harvard 대학 GSD의 Architecture I 프로그램의 지도교수를 역임했다.

 

 

Reiser Umemoto Architects
①Post-Contradictory Practices
모순 후의 실제

 

프로젝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면 우리의 사업에 있을 수 있는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구축된 프로젝트와 구축되지 않은 프로젝트들의 윤곽을 잡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결징짓기도 하는 것이 「개연성」이라기보다「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특히 잘 알아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정치적, 시기적, 상황적 힘들 및 기타 힘들의 작용에서 나온 결과인 듯하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이 힘들은 건축가나 플래너의 통제를 벗어난 범위에 있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 자체보다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모더니즘의 시초때 부터 하나의 인식을 이끌어 내었는데 그 인식이란 좌파 및 우파들이 내놓는 건축 이데올로기들이 점점 배타적이고 냉혹한 양자 택일로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그 양자 택일을 이루는 투 대안들은 각기 상황에 알맞게 고정되어 있고 너무나 당연하지만 나름의 이상사회적인 건축 및 도시 프로그램들을 제시한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격투장을 벗어난 이후로도 건축적 담화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힘들(도시를 유지하는 정치, 경제, 문화적 힘들)의 소용돌이」속에서 뒤죽박죽이 되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하나의 프로젝트 속에 건축과 도시에 사용할 계약 용어를 정하지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이 계약은 수동적이지 않을 것이다(수동적인 적이 있었을까마는). 이는 이 계약이 건축적으로 하나의 거울같은 작용을 하고 기존의 관습적 형태를 널리 알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기존의 구조를 능동적으로 재형성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구조를 동요하는 어떤 것이 되도록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이제껏 나온 적 없던 새로운 관계를 - 그레그 린,「건축의 켜닐리니어리티, 접힌 것, 시설과 순응성」AD, 건축 안에서의 접음, 런던, 1993,8.

- 상황 속에 갖다주는 수단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는 형식적이고 전형적이며 관습적인 패턴들이 고정되고 이미 알려진 특징들을 지닌 것이 아니라 열려 있고 발전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분명히 드러난다. 로베르토 웅가가 말한 것처럼,「어떠한 관습과 사상의 승리가 비교적 우연한 것이라면, 그것들이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는 것 또한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규정 밑에서「신도시주의」에 관한 논의의 중점은 차이점, 이질성, 다중성 그리고 다양성에 두어져 왔다. - 같은 책, 9

이것은 모더니즘에서 선전하는 물리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동질성이라는 분명한 조건에 상응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실제의 극단적인 예는 한편으로는 역사주의가,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주의가 제시해 왔는데 이 예들은 정적 아이덴티티의 주요 가정을 그 구성 요소들에 놓음으로써 모순을 악화시켜 이질성을 얻으려고 했다.

- 제프리 키프니스,「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건축 속에서의 접음」, 142. 이러한 변증법적 계약들은 모순을 어떠한 장래의 「합(合-진테제)」위에 놓인 약속 어음과도 같은 것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시한 이상주의적 프로젝트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소위「모순 후의 실제」가 도래할 때에만 찾아온다. 이러한 규정 밑에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경향들의 철학적 개요와 잠재적 차용 가능성은 다른 분야에서 열렬히 묘사되고 있다.

- 같은 책, 41-49. 여기에서, 우리가 수행한 바 있는 특정 프로젝트를 거쳐 우리의 프로젝트가 모순 후의 뼈대 속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나를 찾는 것은 이론적 통찰을 설명하고 싶다는 의도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론은 실제보다 더 상위의 우선권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론은 건축 외의 영역에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이론화와 실습의 순으로 이어지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오히려 이론(혹은 숙고하고 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 스탄 알렌,「어떠한 조건 하에서 그 실행」, 건축과 이론에 관한 콜럼비아 다큐먼트- 과 실제와의 수평적 관계가 인정되는 경향이 짙다. 두 번째 이유는 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현재의 경향에서 추정한, 혹은 더 나쁜 경우 일련의 이상사회적 구조에 바탕을 둔 예측에서 추정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 에세이의 윤곽을 잡는 것보다는, 좀더 겸허하게 노력하여 프로젝트들 스스로 드러내는 「새로운 것들」의 연모를 설명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Jesse Reiser
1958년 뉴욕에서 출생, Cooper Union과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고부하고, 현재 Columbia대학 건축학과의 조교수, Reiser+Umemoto의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


Nanako Umemoto
일본 교토에서 출생, Osaka 미술대학에서 도시계획과 조경을 공부하였고, Cooper Union을 졸업했다. 현재 Columbia대학 건축학과의 조교수, Reiser+Umemoto의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11/when.html ]

Complexity Theory and Contemporary Architecture and Design
콤플렉시티이론, 그리고 현대건축과 디자인

By Michael Speaks
뉴욕에서 비평가와 편집자로 활동하는 스피어는 하버드대학원과 파슨즈 디자인스쿨에서 가르쳤고 현재(95년) 네덜란드의 델프트공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난 십년간 콤플렉시티의 과학은 서양 학문의 주요 세력이 되어왔다. 1987년 「카오스」가 출산되면서 뉴욕 타임스의 과학 전문기자 제임스 글레이크가 카오스 이론에 관련하여 최근 급박하게 밀려드는 복잡한 사상들과 쏟아져 나오는 서적들, 그리고 인기있는 과학 논문들을 조사해본 결과 그 분야의 흐릿한 집단들 가운데 새로운 과학자들- 미첼 페이겐봄, 에드워드 로렌쯔, 베느와 만델브로-이 떠올라 완전히 새로운 과학의 스타가 되었다. 카오스 이론과 콤플렉시티 이론이 1987년의 과학계를 휩쓸자 IBM에서는 自社 연구원이며 차원 분열 기하학의 「아버지」인 만델브로를 자랑스럽게 털레비젼 광고 시리즈에 출연시켰다. 이 과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예전까지 일반 대중에 인식되지 못했던 과거의 연구들이 새로이 긍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저 유명한 저서 「카오스로부터의 질서」로부터 19세기 수학자 헨리 포인케어와 같은 19세기 수학자들의 저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 가운데 「카오스로부터의 질서」는 1977년의 노벨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과 그와 동료 연구원 이자벨 스텐저가 쓴 것으로 콤플렉시티 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콤플렉시티 이론이 지니는 매력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아주 잠깐 포인케어에 관해 언급하 고자 한다. 그는 1830년대에 3動體의 문제(three body problem)라고 일컬어지던 것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그 문제는 지구의 공전 궤도에 대한 계산이 불규칙적일 때 발생했으며, 이 불규칙성은 달과 지구의 중력 사이에 간섭이 생기는 데 연유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非직선 적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해결책을 제시하 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포인케어는 비직선적 문제에 선적 방법을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상을 수상 할 수 있었다. 이로써 포인케어는 하나의 밑바탕을 구축한 것인데, 후에 그 밑바탕 위에서 본래의 조건, 계산이 불가능한 숫자만큼의 영향력있는 요소들, 소규 모의 혼란, 불규칙성과 불명확성, 그리고 이것들이 날씨의 패턴, 인구변화, 흉작, 전염병 등 보다 큰 시스템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들을 다시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건축과 도시주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피터 아이젠만은 차원 분열 기하학, 그리고 비례 축소학과 귀납법 등의 테크닉들을-이 들은 모두 콤플렉시티 이론의 뼈대이다 - 자신의 디자인에 도입하여 새로운 건축 형태들을 양산해 냈다. 이 건축 형태들은 결정 불가능하고 포스트모던하며 포스트인도주의적인 최근 의 새로운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아이젠만의 작업은 지적인 자극과 지시에 목말라 있는 새로운 새대의 모든 젊은 건축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작품이 갖는 복잡성은 그의 개인적 영향력과 지적인 화려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인젠만의 실험적 작품들 고 그것들이 이끌어낸 콤플렉시티 모델들은 大家가 던진 미끼 속에 들어있는 지적 속임수로 서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의 두가지 사건들은 건축과 도시주의 속에서 콤플렉시티가 갖는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아이젠만의 실험주의를 향해 우리의 눈길을 다시 돌리게 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새로운 것들에 대한 필립 존슨의 연모였다(이것은 조 금만 냄새를 맡아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콤플렉시티 이론과 새로운 디자인 기하학 에 대한 최근의 존슨의 외도-이는 코네티컷 뉴 캐나안의 그의 저택에 그가 최근에 완성한 정자「몬스타」에서 볼 수 있다-와 더불어 무엇인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 사건은 최근 이루어진 찰스 젠크스의「점프하는 우주의 건축」발간이다. 이것 은 우리 모두가 원했을지 모르는 건축의 복잡성에 입각하여 이론적으로 서술된 책이 아니 다. 지그프리드 기드온이 과학에 기초해 저술한 「우주, 시간 그리고 건축」이 20세기 중반 건축과 도시주의의 원칙이 되었듯이 콤플렉시티를 20세기말 건축과 도시주의를 이루는 원칙 으로 만들고자 하는 젠크스의 의도가 표출된 책이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찰스 젠크스는 「점프하는 우주의 건축」의 서두 부분에서 「이 책은 건 축을 해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건축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씌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필립 존슨이 니체 철학의 영향으로 복잡성에 매력을 느끼고 건축 정서의 카마 수트라를 풍 부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젠크스가 콤플렉시티에 매료된 것은 그와는 정반대의 산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복잡성은 그가 늘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공포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놀라운 자유를 거듭 말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점프하는 우주의 건축」에서 젠크스는 모더니즘 건축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했는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있고 무엇을 「전달」하며 어떤 「의미를 갖는 가」를 비판하고 있다. 젠크스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이란 결정주의와 일원주의, 그리고 단순 성을 위미하는 것이며, Mies Van der Rohe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일원적이고 기계적인 미학 을 통해서, 그리고 직각과 I형 빔을 통해서 이것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찰스 젠크스에게 모 더니즘이란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젠크스가 지지하는 새로운 건 축은 콤플렉시티나 카오스의 모습을 띤 건축을 통해 전달되는 새로운 의미를 그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젠크스의 단일한 강조 속에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1970년대 초 에는 로버트 벤츄리와 스코트 브라운의 저 유명한 저서「라스베가스에서의 교훈」간행과 더 불어 커뮤니케이션이 그 시대 건축 작업의 지배적 요소로 떠올랐었다.(몰론 벤츄리는 이때 이미 1966년에 간행된「건축의 복잡성과 대립성」속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복잡하고 대립 적 의미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우리가 배운 것은 새로운 건축 스타일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 실행 방식이었다. 벤츄리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한 모텔에 대해 말하면서 이 점을 언급한다.「몬티첼로의 분위기, 커다란 쉬팡달 옷장의 그 림자를 모텔 앞 고속도로에서 볼 수 있다. 스타일과 기로로 이루어진 이 건축물은 反공간적 이다. 이것은 공간을 뛰어남은 커뮤니케이션의 건축물이다. 커뮤니켄이션은 하나의 요소로 서 건축물과 주위 배경을 지배한다.」대중 문화와, 대중적인 이미지 및 기호 시스템이 번창 함에 따라 건축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의미 생산이 공간 생산을 대체하게 되었다. 과학 이 전에 벤츄리가 새로운 건축 현실의 도래를 알렸던 반면, 젠크스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 어」같은 책에서 건축 커뮤니케이션을 이오니아식 기둥이나 피아자처럼 형태를 통해 고전주 의와 안정성, 그리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언어로 축소시켜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 한 형태의 언어와 그것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를 기초로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 그리 고 포스트모던의 구분을 주창함으로써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젠크스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복잡성을 전달하는 것이 건축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이 스스로에 관련해서 서양 세계에 말해주고자 하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콤플 렉시티의 과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통찰과 진리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 리가 도시와 도시환경 등 보다 큰 시스템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통찰,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의 짜임과 연속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에 대 한 통찰, 그리고 서양 과학에서 기본적으로 구분하는 질서와 무질서를 담고 있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통찰들이다. 콤플렉시티의 과학은 젠크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들 중에서 선책할 수 있는 새 팔레트를 주었고, 그것이 전달하는 새로운 미학적 언어를 주었다. 「자연 에 가까운 건물과 디자인의 언어, 그것은 비틀리고 접히고 구부러져 있으며, 수정같은 형태 와 부서진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종종 양자 세계를 강조하고 어쩌면 수퍼스트링- 물질의 자그마한 진동 단위-과 더불어 우주 자체를 강조할 수 도 있는 물결 운동에 기초하 는 형태 언어가 되기도 한다.」젠크스는 모든 양식의 건축 형태에서 카오스를 발견한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다음의 두 가지 모두를 말한다. 피터 아이젠만이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레 브스톡 공원이나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콜럼버스 컨벤션 센터를 만들 때 사용한 설계처럼, 건축물의 복잡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카오스 과학과 콤플렉시티의 과학을 사용한 건축물, 그리고 젠크스가 말하는 브루스 고프의 차원 분열 도형이 지닌 「기묘한 매력」이라든가 양 자 메커니즘의 갈라지는 선들에 따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의 곡선적 형태처럼, 그러나 카오 스 이론과 콤플렉시티 이론이 건축과 도시주의에 무엇인가를 부여해 준다 하더라도-나는 분명 그렇다고 확신하지만-건축물은 고프의 「Bavinger House」의 플로어 플랜이 그러하듯 그것이 「기묘한 매력」을 갖는 면 공간의 다이어그램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다이어그램들이 다차원적이고 역동 적인 시스템 내의 움직이지 않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이차원적 지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 다. 그것들을 형태상으로 재생산한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의 역동적 행위들이 재생산되지는 않는다. 콤플렉시티의 건축은 단순히 건축과 도시 형태 속에 복잡성의 과학 모델과 다이어 그램을 나타내는 데서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더 나아가 이러한 다이어그램이 형성하는 도 시와 교외의 역동적 시스템 속에 간섭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면 건축과 도시주 의에 관해 보다 더 광범위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실행은 그들이 속한 환경을 나타내 는 데에 우선적으로 관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변형시키기 위해 환경 속에 간섭해야 하는가?

일찍이 언급한 바와 같이, 콤플렉시티의 사상이 가져온 중요한 발전 중의 하나는 非直線性 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직선적으로 생각하면 작은 변화는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는 비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비직선적으로 생각하 면 소규모의 변화도 대규모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한 혼란도 시 스템 전체의 역학을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 저 유명한 나비 효 과를 들어보자. 나비 효과란 예를 들어 서울에 있는 나비의 날개가 펄럭임으로써 대기중에 변화가 생기고, 시간이 감에 따라 이것이 확장되어 날씨 전체에 영향을 끼쳐, 이를테면 텍사 스의 토네이도라든가 북대서양의 허리케인까지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가 장 작은 행동들이 뒤얽혀서 시스템 전체에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편, 무한에 가까운 숫자의 초기 시스템 조건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스템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콤플렉시티의 사상이 갖고 있는 통찰력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시스템들 사이의 관계와, 건축이나 도시주의 실행같은 시스템이 변화하는 양상을 보 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진물은 과연 콤플렉시티의 사상에 의해 건축이 변화하 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건축가들과 해체주의 건축가들처럼 건축의 형태 언어, 「건축의 모습」에 생기는 소규모의 변화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건축의 실행방식,「건축의 능력」에 생기는 변화를 보고 있는가? 젠크스의 경우 변화는 분명히 소규모의 것이다.

건축과 주위 배경을 위한 그의 디자인을 보면 콤플렉시티 이론의 다이어그램은 건축 형태 속에 만 나타난다. 복잡한 다이어그램을 닮은 조각으로 장식된 가구라든지 겹겹의 형태로 둘러싸 인 정원들은 복잡성을 보여주지도 않고 건축과 도시주의, 그리고 그들 각각의 환경 사이에 성립하는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마치 지진의 진동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아이 젠만의 도쿄 누노타미 본부나, 가까이 있는 강의 후미에서 발산되는 가상의 솔리톤波가 만 들어낸 듯한 형태-그러나 이 역시 콤플렉시티의 또다른 형태이다-를 지닌 하우스 이멘도르 프처럼, 젠크스의 건축 읽기와 그의 디자인들은 외형과 표현에, 즉 「건축의 모습」에 긴밀 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콤플렉시티 이론을 이러한 축소적 접근에서 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것은 젠크스나 아이젠만이 아니라 아이젠만의 後學들-제프리 키프니스, 그레그 린 샌포드 퀸터-이었다. 이 건축가들은 다른 글과 디자인들을 통해 필요한 류의 변화에 영향을 줌으로써 건축이 커뮤니케이션과 의미를 실행하는데서 벗어나 도시와 교외의, 그리고 우리 가 살아가는 주변의 환경들을 활동적으로 형성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 건축이 중요 한 이유는 그 모습이나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역할 때문인 것이다. 제프리 키프니스가 노골적으로 非지시적인 건축 형태와 새로운 접목 및 드로잉 테크닉을 발전시킨 것은 아이젠 만의 표현적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보아야 한다. 마침내 그렇게 되고 나면 키프니 스의 디자인은 콤플렉시티의 사상의 모습만 띠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 자체로서 행동하여 바 로 자신이 속한 환경의 일부로 화한다. 키프니스의 도로잉 테크닉이 대개 그렇지만 그중에 서도 특히 중국 창리우 집단 지역에 적용된 그의 드로잉 테크닉에서 지역(area)은 약진하여 정서적이고 기호학적이며 포스트콜라쥬적인 방식으로 건축의 시각화에 접근한다. 사실 우리 가 건축물의 의미를 판독한다든가 전통적 건축으로서의 모습에 지나치게 초점을 맟추다 보 면 뭔가 중요한 것을 잃고 말 것이다.

그레그 린과 비평가 샌포드 퀸터는 아이젠만의 후학들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두 사람으 로, 콤플렉시티의 아이디어와 개념을 건축과 도시주의 속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도입시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린은 그의 글 속에서 역동적이지만 굳건한 건축물, 자신의 환경을 접 어넣기도 하고 접어 내놓기도 하는 건축물을 옹호하는 주장을 계속적으로 펴고 있다. 그리 고 그 일부로서 환경은 콤플렉시티의 사상 그 자체이다-그 다이어그램과 개념, 방정식 뿐 아니라, 건축의 문제는 형태와 짜임이 아니라 건축이 힘과 긴장이라고 분석한 결과까지 포 함해서. 벤 반 베르켈에 관한 최근의 기사에서 린은 반 베르켈의 다이어그램 사용을 강조하 면서, 그 다이어그램들은 유동적 디자인 과정의 표현적인 요소가 아니라 추상적인 요소이며, 유동적 디자인 과정은 개념과 형태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디자인에 유용한 힘인가 그렇지 않은 힘인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는 린의 의견에 동의하며, 더 나 아가서 반 베르켈이 이들 젊은 건축가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콤플렉시티를 디자인에 짜맞추 었다고 생각한다. 까롤린 보와 더불어 반 베르켈은 건축이 형태에 관한 철학적·과학적 개 념을 맹종하여 나타내지 않고 힘과 흐름, 긴장, 정서, 그리고 개념을 형성하도록 바꾸어 놓 으려고 했다. 그의 「교차점」의 개념에서, 예를 들면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다리 디자인을 형성하는 수많은 힘들 속에서(여기에서의 힘이란 공모전 수상이라는 부정적 힘 뿐만 아니라 기술상의 힘과 공학적 힘들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다수의 형태들이 강 위로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강은 교통의 흐름과 더불어 그 자체 또한 힘들로 생각되어야 한다. 반 베 르켈과 보는 젠크스와 아이젠만에게서 볼 수 있는 복잡성의 표현에 의존하지 않고 기억 할 후 있는 최근의 건축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동적이며 복잡한 건축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반 베르켈과 보가 린과 키프니스와는 달리 아이젠만의 표현적 실행 에 전혀 근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키프니스는 최근의 또 다른 기사에서 반 베 르켈과 보를 다루면서 반 베르켈의 작품이 여러 가지 스타일과 전략들이 짜맞춰져 뭔가 완 전히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깨끗한 혼합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며, 키프니스의 새로운 접목 테크닉, 그리고 린과 퀸터의 복잡성 개념의 도입에 관해 같은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이 아직 아이젠만 본보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오지는 못했 다고 하는 것이 옳을 태지만, 그들은 초기의 첫 발걸음인 셈이며 낡은 방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건축에는 새로운 모더니스트의 물결이 생성되고 있으며, 이 젊은 건축가들은 지구 곳곳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공간의 생산을 대체하였던 의미의 생산이 이제 새롭고 정서 적인 건축 실행에 자리를 내주는 중이다. 이 새로운 실행에서 의미라는 것은 디자인과 디자 인 실행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힘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한 의미를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에로 번역하는 작업이 어려운 이상, 건축과 도시주의를 향해 보다 세계적이고 모 더니스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이 새로운 정서적 접근법은 중요하다. 「펭쉬」와 다른 非 서양의 디자인 원칙들이 공허하고 형식주의적이며 그리하여 무의미한 껍데기가 되기보다 오 히려 여러 가지 흐름과 힘, 그리고 물결들을 다듬어나가면서 문제점을 해결해온 것과 같이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콤플렉시티의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짓된 약속 들과 해체주의의 知的인 태도가 이제 새로운 그 무엇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는 그 것이 나비 효과와 같은 복잡한 행동들을 보여주고, 전 세계의 건축적 실행들을 연결하고 변 형시키며, 여전히 융통성없고 무질서한 도시·포스트도시의 세계 위에 융통성있는 건축 질 서를 낳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空-글/마이클 스픽스

 

 

Jun Aoki & Associate
① The All Architecture Evolves from Roads-Circulation Bodies
     모든 건축은 길로부터 진화한다-순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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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1
「모든 건축은 길로부터 진화한다」는 것은 대략적인 가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적으로 상당한 매력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설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지난 몇 년간 내 작업실에서 나온 많은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 다. 기묘한 용어이긴 하지만 부족한대로 우리가 이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는 「순환체」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같은 「연결되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연결물」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 문에 우리가 「모든 건물은 길로부터 진화한다」라고 할 때에는 무엇보다 「연결물」들이 지배적이고 우선시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逆이다. 왜냐하면 우리 는 기본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들」이 우선시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예로 들어보자. 도시에 왜 길을 만드는가? 도시에는 사람들이 가보아야 할 장소가 많이 있다. 이것들은 「연결되어지는 것들」, 즉 시장이나 극장, 절 등이다. 이것들을 「연 결」하기 위해 길이 만들어진다. 디시 말해 수단은 대상(목적지)이 있을 때에만 선택되어지 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건축은 길로부터 진화한다」라는 가설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길이란 오로지 건물들이 존재할 때에만 필요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아마도 오늘날의 일반적 개념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순환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길이란 사람들이 순환 (곳곳으로의 이동)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을 좀더 역동적인 것으 로 만들기 위해서, 혹은 그 움직임을 산발적인 것보다는 조직화된 패턴으로 만들기 위해서, 길은 좀더 특정한 성질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건축이 아닐까? 먼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다음으로 그 과정으로부터 대상(목적지)인 공간들이 물리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나는 우리가 미리 생각해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우연 히 연결되는 장소, 생각해보니 그곳이 목적지였던 기억이 나는 장소로 가게 된다고 생각한 다. 결국 삶이란 비유로써도 그렇고 실제적으로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눈을 어느 한 곳에 고정시켜두기 보다는 계속하여 순환한다. 「연결되어지는 것」이 아닌「연결물」들, 그것이 바로 건축의 뿌리인 것이다.

「연결물」들이 기본적으로 부수적인 역할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개념 속에서 뿐 만이 아니다. 현대 건축의 역사에서 「연결되어지는 것」들은 견고한 상위의 영향력을 지니 게 된다. 예를 들면「문화 홀」은 두 가지의 건축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현관과 로비, 복 도, 엘리베이터, 계단 등의 「연결물」들과, 콘서트홀과 무대같은 「연결되어지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집단 사이에는 분명한 순서상의 관계가 있다. 즉 건물의 기능, 「연 결되어지는 것」들이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연결물」들이 온다는 것이다. 건축가가 「우 리는 이 로비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뮤직 홀을 만들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기묘한 일이 될 것이다.
「연결물」에 우선권을 주는 하나의 예는 르 꼬르뷔제의「프롬나드 아르쉬튀랄」(건축적 산 책)이다. 「산책」이란 본질적으로 고정된 목적지, 즉 「연결되어지는 것」없이 걷는 것이 며, 산책하는 사람이 가치를 두는 것은 「연결물」인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있다. 르 꼬르뷔 제는 산책은 그 기능적 의미를 넘어서서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詩」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회고해 보건대 나는 이러한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적 개 념을 「연결물」=「순환」이라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로 떨어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연결되어지는 것」들은 우선적 존재로 생각되어져 왔으며 이러한 가정을 기초로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를 계속 추구해 왔다. 「구성」이 주 된 주제였던 시기가 있었으나, 구성이 주된 주제인 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비판적 문제 속에서 「순환」이라는 용어가 정말 짜증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의 몰락은 그것이 모든 건축적 공간을 「순환체」속에 되살리려고 하는 데 있 다. 그러나 이러한 몰락은 정확히 말해 무엇 때문에 중요한 것인가?

첫째, 그것은 우리가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재정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학교 란 무엇인가? 박물관이란 무엇인가? 공원은? 광장은? 다리는 또 무엇인가? 이러한 빌딩 차 입은 좀처럼 미리 결정되어지지 않는다(그러나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사물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의 노예가 된다). 목표(목적지)에는 우선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 리려 이들은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재정의된다. 이야말로 디자인=플래닝이 갖는 첫 번째 중요한 역할이다. 그리고 만일 빌딩 타입이라는 용어가 건전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회복시키려면 우리는 아무런 선입관 없이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각각의 빌딩 타입을 재정의할 때 순환체들은「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부응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JUN AOKI
1956년생 동경대학(University of Tokyo)에서 공부하고, 1983년부터 1990년까지 Arata Isozaki & Associates를 거쳐 Jun Aoki & Associates를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Yung-Ho Chang
① PIPES 1989-90
    파이프 19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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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와도 같은 하나의 플래스터 파이프와 여덟 개의 세라믹 파이프, 이들은 마그리트와 푸코를 장난스레 해석하는 한편, 하나의 도구적 매체로 기능하여, 시간과 공간을 움직임과 경험으로 이뤄진 하나의 실체로 보는 중국인들의 時空 개념을 탐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스플릿 파이프를 손으로 다룸으로써 열고 닫는 동작으로 변환시킬 때에만 생명력을 잃고 죽어 있던 대상은 활성화하여 두 개의 프레임을 갖춘 영화처럼 움직이게 된다. 이 영화는 외부에 있는 실물 크기의 파이프와 내부에 있는 하향의 공간구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파이프가 없는 공간은 외부와 내부의 구분을 더욱 뚜렷이 해준다. 그러므로 다음의 모든 프로젝트들이 확고히 하려는 것은 안으로 향한 경험에 관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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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G-HO CHANG
1981년 중국 Nanjing Institute of Technology를 졸업하고, 미국의 Ball State Univ.와 버클리의 Univ. of California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Ball State Univ., Univ. of Mlchigan, 버클리의 Univ. of California에서 강의를 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Rice University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13/comp.html ]

Epilogue
연재를 끝마치며

By 공 철

벌써 이 column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나버렸고 그동안 이것을 위해 공헌한 건축가들도 여럿 되 는 듯하다. 이 Column의 제목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New Generation of Architecture]라고 붙여졌고 28명의 [젊은] 건축가들과 그들의 프로젝트가 인쇄화 되었지만, 필자가 자신있게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연령과는 상관없이 [young]건축에 관심있어 하는 [old] 건축가도 있고, 28명의 건 축가말고도 엄청나게 흥미있고 재능있는 건축가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혹 필자 가 정보에 어두워서 제대로 조사하질 못했고,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유능한 건축가들을 대할 수 없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가 그동안 써 온 text에 대해서도 이런 자리를 빌어 얘 기 하자면, 솔직히 창피함이 앞서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필자 자신도 건축가라고 직업명에 줄곳 써 오지만 이렇듯 [text]로 상대방을 대해야 할 때는 스스로 막막함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더군다 나 좀더 조심스러운 편집과정이 없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이 위험천만스러울 때도 있고 필자가 건축적으로 가장 흥미있어 하는 것, -예를 들자면 건축의 정의와 건축이론의 형태 그리고 이론과 Design의 관계들도 1년여 전에 필자가 이 column에 글쓰기를 시작할 때와 지금의 생각과는 크게 바뀐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의 글을 잠시라도 읽어 볼 기회가 생기면 어떤 글은 가장 중 요한 의도를 잊어버리는 미숙함에 스스로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Contemporary Design을 논하 는데 있어 적절치 않은 건축가의 열거, 철저한 연구와 조사없이 [추측]을 바탕으로한 건축론, 논리 적인 자기모순, 일반적인 합리화의 시도 등등이 눈에 가시처럼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실수를 계속 열거하다보면 이 순간부터는 text 건축을 활자화 할 수 있는 용기를 영영 잃어버릴수 도 있으므로, 이러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기회가 있는데로 그동안의 관련된 생각들과, 그 들의 건축들이 어떤 theme에 계속해서 연관됨을 밝히는데 노력하겠지만 이러한 [Epilogue]란 제 목에 맞춰 건축에 관련된 여러 text에 대한 필자의 의견과 나아가 한국건축에 대한 필자의 바램을 덧붙이겠다.

요즈음에는 우리에게도 건축물과 관련해서 여러 건축 잡지와 건축text들이 주변에 많아짐이 아 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필자와 같이 외국에 거주하는 이들도 한국과 관련된 여러 건축 잡지를 외국 유수 대학의 도서관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것도 기쁜 일 중의 하나이지만, 이러 한 잡지와 text들이 건축문화의 흐름을 깊이 있게 다루기보다는 현상에 치우치는 데에는 아직 반 성해야 할점이 많이 있는 듯하다. 즉 독자의 수요도 생각해야겠지만, 건축 text의 품위와 level이 잡다해짐으로써 아주 천박해지는 것은 미리 고려해야할 점이라 생각하고, 일종의 주석에서 술안주 감으로 얘기하는 잡담 비슷한 것으로 아까운 종이를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이, 건축 text도 어느 정도 추측과 자신만의 건축 번역과 추측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이젠 이런 것을 시정해야 할 때도 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다시말해 건축물을 만들고 그 건축물 에 대한 여러 방향의 건축 읽기를 시도함에 있어 건축가 자신들과 건축비평가들이 게으르다고 밖 에 할 수 없는데, 그것은 평소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필자 스스로도 감히 말할 수 없겠지만, 성실성과 함께 건축을 바라보면 건축에는 사상이 드러나고 분석이 가능하며 이때부터 바람직한 비 평과 더 나은 건축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좀더 극단적으로까지 얘기하자면 혹 외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가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된 건축이 아니고, 잘못 된 점이 있다면 과감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로 국립중앙박 물관의 winning scheme과 2등 scheme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밝힌다면 2등scheme이 1등 scheme보다 2.5배 더 나은 proposal 임에도 불구하고 1등 안되는 것을 보면 답답할 수밖 에 없다. 들리는 바로는 1등과 2등을 놓고 심사위원들이 고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까지 고민을 했는지, 심사위원들의 자질을 의심해야 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 다. 왜 필자가 2등 scheme을 선호하는지를 설명하려면 더 많은 여백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을 밝 히려는 의도는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 competition이 [국립]중앙박 물관 이어서, 또는 [국립]이어서 꼭 한국 건축가가 당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민 족주의라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이것은 [중앙청 철거]와 다를 바가 없다. 필자가 알고 있는 민족주 의는- 꼭 이렇게 까지 표현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지 모르겠지만-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민족주의 라고 하는 것이 수준이 높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건축물을 짓기전에 그것이 다른 제안 과 좋고 나쁨을 따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가정하지만 건축물의 완성뒤에 사람들이 더 나을 수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미달되는 건축공간을 갖게 될 때면 후회해도 때는 늦어 버리기 일쑤이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 또는 우리가 흔히 쓰는, [한국] 건축의 전통과 미학이 높아지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 연령이 높아야 이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랬을 때 참된 민족주의에서 이뤄진 건축물이 완성되고 그래야 결국 우리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이즘]이 되는 것이다. 이젠 성 숙한 [이즘]으로 전환시킴으로서 다른 민족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이즘]을 가져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질문도 던져본다. 그런데 다시 건축 text로 돌 아가 그러한 건축 의식 지체 현상을 부채질하는 것이 일종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건축가들의 글 과 잡지들의 글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란 사고의 그릇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요즘 많은 잡지들이 영어를 혼용할 때에는 건축물과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휘 선 택의 정밀성이 있어야 되고 그 어휘에 대한 설명과 신념이 깔린 정의가 뒤따라야 한다. 예로 우리 가 잘 알고 있고 심심찮게 쓰는 [Deconstruction] 건축이란 단어도 일종의 정치적 propaganda 일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아무 검증도 없이 그냥 받아서 지금도 쓰고 있다. 적어도 건축 지식층과 건축물과 더불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연구를 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다시말해 마치 Deconstruction을 포함해 그 이후의 건 축 Design이나 이론들이 어느 작은 group의 propaganda일 경우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도 함께 써 줘야 한다. 경제 발전 수준이 너무 빨리 성장하므로 그 의식수준이 따라가지 못하 는 것이 문제라면 적어도 일부층이라도 제대로 된 의견과 발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 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필자가 의아스러운 것은 왜 국내의 건축가들은 자신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또는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 발표하지 않으면서도 외국의 대건축가는 신주 모 시듯 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쓰레기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비롯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예로 몇 달전 Any Conference가 있을 때도 결과적으로는 주최 측(한국)과 참가자들의 의견교환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어서 기대감이 많은 실망 으로 변해 버렸는데, 원인 중에는 참가자들의 불성실과 주최측의 미숙한 진행이 근본이 되겠지만 그 이유인즉 참가자들이 주최측의 상황과 내용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그들을 상대로, 당신의 건축은 이러이러한 상황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고 혹시 기회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응용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가 묻고 싶다. 이런 질문은 다시 말해 한국의 건축 엘리트들이 국제건축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 비판의 주요점이 되고 쉽게 말해 우리 건축가들의 전문성이나 프로의식이 일반독자나 건축주의 수준보다 상회하는가 라는 질 문과도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한나라의 지적 수준은 문화가 그 척도라고들 한다. 그 문화의 바탕이 되는 모든 책과 논문을 일일이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또 건축이 그 문화의 일부분을 차지한다면 건축 종사자들은 이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다른 건축인들을 흉보기 전에 지적 수준을 높이고 이를 위해서는 공부 를 하고 모든 일에 대해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프로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건축가는 화가도 음악 가도 아니다. 건축가는 건축가일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젠 많은 다양 한 건축가와 건축들이 정보로써 존재하기 시작했다. 다른 정보를 접한다는 것은 다른 [지식]을 접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의식변화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세계에 대한 더 넓은, 더 깊 은 이해를 얻는 다른 것이 더 나은 것을 향한 변화이고 곧 가치 있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함축한다고 말하고 싶다.

끝으로 이 칼럼이 끝날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공간 편집실의 노고에 감사 드리고 1년동 안의 필자의 편집 gesture에 독자들의 관대함을 부탁드리고 싶다. -보스촌에서 공철



■空-글/공 철

 

 

 

Nana Last & Lester Yuen
① A Parrot House for The Basel Zoo
     바젤 동물원의 앵무새집


이 프로젝트는 바젤 동물원의 후문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위치상의 특성으로 인해 앵무새집은 두가지 기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 하나는 앵무새를 키우는 곳으로서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그곳이 동물원의 끝부분이며 동물원의 후문이 위치한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기능이다. 앵무새 집이 이처럼 여러 가지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곳에 경사가 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경사 를 이용함으로써, 보는 이들이 어느쪽에서 접근해 오느냐에 따라 이 앵무새집이 발휘하는 기능이 달라지게 되었다. 즉 사람들이 동물원을 구경할 때, 앵무새집을 맨 먼저 보느냐, 아니면 맨 나중에 보느냐에 따라 앵무새집은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층부의 야외 새장은 출입구와 높이가 같고, 이 출입구를 통하지 않으면 오직 경사진 통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앵무새집의 각 층을 망처럼 연결하는 통로는 아래쪽 에 있는 실내 새장과 위쪽에 있는 야외 새장을 연결한다. 관람객은 출입구를 통해 들어오면서부터 낮은 유리벽 옆에 서서 유리를 통해 아래쪽에 있는 실내 새장을 보거나 앵무새집 너머에 있는 동물원의 전경을 조망해 볼 수도 있다. 만일 관람객이 동물원 안쪽에서 앵무새집 쪽으로 올 경우 그는 앵무새집의 맨 아래층에서 들어와 야외 새장의 밑을 지나 고 마침내 넓은 공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간접적으로 구경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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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 Last & Lester Yuen
Nana Last
Havard Univ.GSD졸업. MIT에서 역사, 예술과 건축의 이론과 비평 박사과정 수학. Last Yuen Project의 파트너

Lester Yuen
Yale Univ.에서 건축석사 학위 취득, 로마의 American Academy Visiting Artist. Last Yuen Project의 파트너

 

 

Eric Russel Bunge
①20 Parliament Hill(1989-1991) renovation/extension to a Victorian House
  Hampstead,London,England
     바움가르텐의 거주지(1989-1991) 빅토리아식 건물의 보수 및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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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하늘 아래, 여러 틈이 나있는 집 한 채..... 현존하는 그 빅토리아식건물은 어둡고 육중했으며, 서로 연결되 있지 않은 방이 여럿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 기법은 선을 긋고 건물을 분할하는 것이 었다. 대부분의 지지벽들은 제거되고 대신 쇠로 된 구조물로 대체되었다. 지붕과 바닥은 햇빛이 관 통하였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놓여진 길이 1m의 밴드를 따라 유리 바닥이 깔려 있었다. 이 길이 1m의 밴드를 따라 놓여진 반투명의 유리다리는 기본 건물과 2층 짜리 새 부속건물을 연결시켜준 다.이 부속건물은 부속건물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독립건물로 인식되었다.

 

Eric Russel Bunge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출생. McGill Univ., Havard Univ. GSD졸업. 영국과 인도에서 의 작업을 거쳐 현재 Massachusetts, Cambridge에서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www.seoulforum.co.kr/main/korea/architect/n_go/14/14.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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