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교 향교는 주로 조선시대 지방의 유풍을 진작시키고 아울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관학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향교의 설립은 고려 중기로 올라가며 고려시대 향교제도는 중국의 향교제도를 도입하였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점검검하는 곳으로 이는 사회 교화의 이념이 다름 아닌 유교이념이었고, 또한 유교정신, 유교윤리를 국가가 설립한 향교를 중심으로 실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왕들이 향교설립을 통해 그 기반을 견고히 하려 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중앙에서 지방 군,현을 획일적으로 쉽게 통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향교는 지방에 설치한 제사 건축인 문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문묘가 없으면 향교의 개념에 들지 않았다. 즉, 향교는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는 학교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영역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가 있었다. 문묘는 전통적인 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로 그 존재가치가 컷던 만큼 향교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외 서무35가 함께 자리하여 형성된 구역이다. □ 나주향교 | 나주향교는 '전묘 후학'의 배치 유형으로 앞쪽에 문묘가 오고 같은 축선상의 뒷쪽에 강학구역이 위치했으며 성현의 신의를 안치한 문묘구역이 강학구역보다 위계성이 앞선다는 논리에서 구성되었다.
배치 모습에서 보듯이 동·서재가 각각 11칸이며 성균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계성사도 있다. 계성사는 공자와 사성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이다.
또한 문묘구역은 대성전과 동·서무라는 명칭상 부터 현격한 차이를 두었는데 예를 들자면 공자를 비롯해 사성을 모신 건물은 '천'으로 명명하여 대궐과 같은 위계를 같게 한 반면 우리나라 18현 및 중국의 하위 선현을 모신 건물은 '무'라고 하여 행랑의 정도로 격하시켰다.
|
<자료출처 : 나주향 교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