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역사
Posted 2004. 7. 28. 04:48▶ 보드게임과 예지
저는 문명이랄만한 것이 없었던 태고적 시절에는 인간들이 참 구차한 삶을 살아야 했을거라고 상상을 해 봅니다. 먹을것을 구하기는 어렵고,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호환, 마마, 가뭄, 홍수 등등의 자연재해들은 그것이 엄습해 올 때마다 인간 집단들에게 큰 고통과 희생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와서야 다행히 우리들은 그런 재난들이 주사위를 던질 때와 비슷한, 카오스의 법칙이 작용해서 생기는 우연의 조화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재난에 미리 대비하거나 때로 그것을 극복할만큼 자연을 통제할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법칙들에 대해 무지하고 자연을 통제할 힘도 없었던 옛날의 인류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연의 힘을 띈 신이나 정령들이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을 경외하는 정도였겠죠. 여기에서 초기의 신앙, 애니미즘이 탄생하게 됩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지하기 위해 샤만이나 무당은 무엇을 할까요? 그는 신령한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할 수도 있고, 개울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서 정령의 속삭임을 들으려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령들과 보다 적극적으로 교감을 하려면 그들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냥 "내일은 비가 내릴런가요?" 하고 묻거나 굿을 하는 정도로는 좀 부족할 겁니다. 정령들이 "내일 아침 최저기온은 14도, 낮 최고기온은…"이라고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질문은 그들이 대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야죠. 그래서 무당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한쪽에 붉은 표를 긋고 "오 위대한 바람신이시여 내일 비를 내려주시려면 우리에게 그 뜻을 보여주소서" 라고 축원하며 나뭇가지를 위로 던져 바람의 뜻에 맡기게 됩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최초의 점 치는 도구가 탄생하였을 겁니다.
실제로는 날씨나 재난이 우연히 일어나듯 이런 식으로 점을 친 결과도 우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우연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이 두 가지의 우연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후자의 우연, 즉 점치는 방식을 서서히 복잡하게 진화시켜 나갔습니다.
제가 보드게임의 역사를 논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조금은 긴 듯한 점치기에 관한 이야기로 썰을 풀기 시작하는 이유는, 보드게임의 한가지 중요한 요소인 "우연성"의 기원을 먼저 짚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연성을 창출하는 도구, 즉 점을 치는 도구들은 이렇듯 그 기원을 까마득한 선사시대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물을 그대로 쓴 것이나 최소한의 투박한 가공만을 거친 것이 많습니다. 동물의 뼈, 나뭇가지, 거북의 등껍질 등등이 쉽게 들 수 있는 그 예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주사위들의 재질과 모양이 이런 점 치는 도구들과 유사하다면 그것은 주사위가 바로 점술과 예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고대의 유적들에서 발견된 주사위들(이하 '주사위'라고 하면 어떤 게임을 위해 우연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을 뭉뚱그려서 가리킵니다)의 연대는 거의 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700년경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주사위들이 제일 오래된 유물입니다. 유물로 발견된 고대의 주사위들은 대부분 동물의 뼈로 만들어져 있고, 자연적인 뼈의 모양에 적은 가공을 가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 그림과 같은 모양을 한 반추동물들의 복사뼈는 그대로 주사위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유물로 남아있는 경우는 보다 드물지만, 콩 같은 식물의 열매나 나무도 훌륭한 주사위의 재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콩은 반으로 자르면 동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고, 나뭇가지의 옆면을 적당히 깎아내면 윷 모양을 만들거나 삼각, 사각, 오각기둥등의 모양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모양의 주사위도 유물로 적지 않게 나오고 있으며, 현대나 가까운 근대의 여러 게임들에서 일부 남아있습니다. 가까운 우리나라의 예를 든다면 윷놀이에 사용되는 윷이라든가, 조선시대의 승경도놀이에 쓰이는 윤목(輪木)이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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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승경도 놀이용 윤목, 오각기둥의 모서리에 금을 그어 숫자를 표시했다. 배부른 기둥이라는 것에서 자못 운치가 느껴진다 (경기도박물관)] |
이렇듯 최초의 주사위는 대자연의 선물(?)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므로 세계적으로 실로 다양한 모양과 재료의 주사위가 사용되었고, 실로 인공적인 모양이라고 할만한 정육면체 주사위는 고대에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보듯 보드게임의 중요한 도구인 주사위 --- 주사위건 윷이건 기둥이건 --- 가 점치는 도구에서 유래하였다는 것 이외에, 보드게임이 점치기에서 유래하였다는 다른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으로는 한가지 도구가 점과 게임 양쪽에 모두 사용되는 사례와 게임 자체에 점을 치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전자의 예로는 여기서 언급하기엔 좀 후대의 발명품이지만 트럼프 카드를 들 수 있고, 후자의 예에는 윷놀이와 바둑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원래 타로 카드와 합쳐져서 한 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세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타로 카드와 지금의 게임 카드로 나뉘어지면서, 한쪽은 점을 치는데 특화되고 한쪽은 게임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트럼프의 변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사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게 될 터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윷놀이는 백제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 놀이라고도 하고 중국의 저포라는 놀이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려시대에 몽골에서 전래된 놀이라고도 하는데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초에 주로 즐기며 게임에 돼지, 개, 염소, 소, 말 등의 가축 이름이 붙어 있는 등의 특징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윷놀이가 적어도 한때는 한해의 운수를 점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의 일종의 의식적인 놀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매월당 김시습이 [만복사저포기]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서 자기 운을 시험하는 어쩌면 한심한 총각 이야기를 쓴 배경이 단지 김시습이 아는 놀이가 그것밖에 없어서였기 때문은 아니었겠지요.
바둑이 과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운행에 관한 여러가지 상징들을 담고 있는 철학적인 게임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대략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둑의 흑돌과 백돌은 음과 양을, 사각형의 판은 사계절을, 361로는 일년의 날수를 각각 상징한다는 식의 설명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바둑판은 9줄, 13줄, 17줄, 19줄 식으로 차츰 발전해 나간 것으로 밝혀졌으니, 처음의 9줄 바둑판에서 뭔가 새로운 철학적인 의미를 찾지 않는 한 바둑과 천문과의 관계는 조금 에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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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일본 황가의 보물인 목화자단기국(木畵紫壇碁局).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했다고 한다. 17줄과 17개의 화점이 있는 바둑판이다. (soonjang.netian.com) |
하지만 실제로 옛날의 바둑의 뛰어난 고수들 중에는 직업적으로 천문을 연구한 학자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설에서도 한 사람, 혹은 한 나라의 명운이 한 판의 바둑으로 풀이된다는 테마가 심심찮게 발견되고는 합니다. 예를들면 삼국지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할 수 있는 관로(管輅)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 위나라에 관로라는 점성술의 대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남양현이란 시골 동네를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밭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안초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안초의 관상을 보아하니 머지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관로는 "아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잘 생긴 소년이 고작 스무살까지밖에 살 수 없다니!"라고 중얼거렸다.
소년의 부친은 이 소식을 듣고 관로에게 찾아와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관로는 안초를 불러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청주 한통과, 말린 육포를 준비해, 묘(卯)일에 자네 밭의 남쪽 끝 뽕나무 아래로 가게. 거기서 두사람의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테니, 그 옆에 술을 따르고 육포를 놓아두면, 두사람이 술을 마시고 육포를 먹을 것이네. 그들이 잔을 비우면 술을 따르고 이렇게 해서 술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게. 만약 그들이 무어라고 말을 하더라도 아무 말하지 말고, 그저 머리 숙여 인사만 하면 되네. 그러면 그들이 자네를 구해줄 걸세."
안초는 관로가 일러준 날짜에 그 뽕나무 아래에 가봤다. 그랬더니 과연 노인 두사람이 바둑에 몰두하고 있었다. 북쪽에 앉은 노인은 검은 도포를, 남쪽에 앉은 노인은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이들의 풍모가 신선 같았다. 안초는 관로가 시킨 대로 그들 앞에 술과 안주를 가만히 놓아두었다. 두 신선은 바둑에 푹 빠져 무의식중에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신선들은 기분좋게 취하게 됐다.
그때 북쪽에 앉아 있던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이 안초를 보고 꾸짖듯 말했다. "이런 데서 뭘 하는 게야. 저리 가거라!" 그러나 안초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방금 우리가 이 청년이 가져온 술과 안주를 먹었으니, 그렇게 박대하지 말게." 그러자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은 "그럼 저 소년의 수명을 늘려 주자는 말인가? 이 소년의 수명은 태어나서부터 정해져 있네. 자네 명부에 적혀 있는 탄생일과 내 명부에 적혀 있는 죽는 날을 우리 맘대로 고친다면, 이 세상의 질서는 금방 어지러워질 것이 아닌가?"라고 응수했다. "그렇긴 하네만, 이미 저 친구에게 실컷 얻어먹은 우리가 아닌가? 그것도 빚은 빚이니 우리 어떤 방법을 강구해보자구."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끈질긴 설득에 검은 옷 입은 신선은 하는 수 없이 "그 친구 참 끈질기기도 허이. 그래 여기 수명부가 있으니 자네 요량대로 해보게"라고 말하며 승낙하고 말았다. 붉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검은 도포 신선에게 수명부를 건네 받아 소년의 이름을 찾아봤다. 수명부에는 소년의 수명은 19(十九)세에 불과한 것으로 돼 있었다.
붉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붓을 들어 열십(十)자에 한획을 더해 아홉구(九)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의 수명은 아흔 아홉(九九)살이 됐다.
안초가 돌아와 관로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니, 관로는 "북쪽에 앉은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북두칠성이고, 남쪽에 앉은 붉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남두육성일세.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지.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 깃들면, 남두육성은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육성은 사망일을 기록하는 거야"라고 말하고는 멀리 떠나갔다.
또한 증산도의 교리 중에도 한반도의 명운을 다섯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는 모습인 오선위기(五仙圍碁)의 형세로 풀이하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현대에 와서 초과학적인 것에 대한 불신의 세계가 된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냉엄한 확률의 법칙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제임스 랜디 영감님께서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능력은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게임을 하면서 주사위를 던질 때나 카드를 뽑을 때 뭔가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할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곤 합니다.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순간, 그것은 인류가 먼 태고적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자연의 정령들에 대한 기억이 일시 반짝 빛을 보는 순간이 아닐까요.
▶ 보드게임과 신화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들은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문명이라 부를 만한 것이 발생하면서 종교로 발전하게 됩니다. 종교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사회를 결속시키고 유지시켜주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모든 지배적인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거나 현세에 모종의 인생역전이 있을 것을 약속하므로써 사회 질서의 유지에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선사시대의 소박한 믿음들에 기반을 두고 있던 많은 보드게임들은 이 때 '독립된' 게임으로 분화와 발달을 계속하느냐, 혹은 신앙을 전파할 도구를 찾고 있던 종교에 흡수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조금 대담하게 표현한 것 같긴 합니다만.
종교적인 제의에 흡수되거나 종교적인 의미를 갖도록 의미가 변형된 게임은 그다지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당대에는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고대 이집트에 존재했던 메헨(MEHEN)이라는 게임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H 발음은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발음할까 말까 하는 오묘한 음운이랩니다만 그냥 메헨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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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메헨 게임의 보드와 게임의 말들, 폭넓은 시대에 걸쳐 여러 개의 메헨 보드가 출토되었다 (University College London)] |
메헨의 보드는 또아리를 튼 뱀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메헨 게임의 규칙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드의 형태와 메헨에 대해 언급한 문헌의 내용에 미루어 보면 메헨은 바깥쪽의 뱀의 머리에서부터 안쪽으로 자신의 말을 움직여 나가야 하는 일종의 경주 게임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메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초기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라(Ra)는 태양의 배를 타고 하늘을 일주한 뒤 밤에는 지하세계를 통과하게 됩니다. 12시간으로 나뉘어진 밤의 제 7시에 라는 이집트의 악마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아포피스(Aphopis, 혹은 아펩Apep)와 싸우게 되는데 이때 라를 보호하기 위해 메헨이라는 신이 거대한 또아리를 튼 뱀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라는 결국 아포피스를 물리치지만, 결코 죽일 수 없는 존재인 아포피스는 매일 밤 다시 라에게 도전합니다. 이집트인들은 그래서 매일 태양신을 공경하고 아포피스를 저주하는 의식을 행해서 태양신을 도와야만 했습니다. 신화에서 위대한 태양신 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도와주는 신 메헨은 이집트인들에게서 아마도 퍽 괜찮은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메헨 보드 게임은 사람들의 이러한 믿음을 가졌던 이집트 구왕국 시절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천여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이 지난 후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게임의 형태로는 잊혀지고 막연히 메헨 신의 상징 정도로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게임이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도…) 그러는 한편 세월과 함께 메헨 신의 역할도 변화했습니다. 메헨 신이 태양신과 그의 배를 감싸고 보호해준다는 믿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역할은 묘하게 변질되어서 죽은 뒤에 저승에서 태양신을 만나서 그의 배에 타고 저승을 여행하려 한다면 먼저 그와 세네트(Senet)라는 보드게임을 해서 이겨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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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세네트 게임을 하고 있는 네페르티티 여왕. 세네트는 대략 현대의 백개먼(Backgammon)과 비교되는 게임이다. |
신화의 내용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세네트라는 게임이 메헨과 무슨 특별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메헨이라는 게임은 잊혀졌지만 그 중간에 메헨 자신이 [보드게임의 신]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집트 연구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네트를 잘 하지 못하면 사후세계에서 애로사항이 꽃피었을 테니 이집트인들은 생시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연습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메헨은 지금까지 알려진 신들 중 유일하게 "보드게임의 신"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신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사위 하나나 카드 한장에 모든 것이 걸린 절대절명의 순간에 메헨에게 기원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보드게임과 이데올로기
만일 독자분이 이집트의 신들을 믿지 않는 불경한 이교도 내지는 무신론자라면 (그렇다면 부디 오시리스께서 자비를 베푸시길…) 이집트의 뭐시기 라는 신과 그가 대표하는 게임 등등이 나한테, 혹은 현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코웃음을 치실 법도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고대에 보드게임이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신앙심 고취에 일조를 했다면, 종교가 그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온 현대에는 비슷한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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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추억의 뱀주사위 놀이. 공산당을 물리치거나 간첩을 잡으면 보상을 받는 건전하고 교육적인 게임이었다] |
처음 만들어졌을때는 단지 뱀과 사다리만 있는 형태였던 간단한 경주 게임이었지만 이 게임은 그후 백여년에 걸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 시대마다 조금씩은 다른 "악행"과 "선행"이 게임에 첨가되면서 도덕적인 가르침을 설파하는 교육적인 게임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어떤 행동이 나쁜 행동이고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 행동인지를 판정하는 사회 이데올로기의 학습 도구가 된 셈이죠. 우리에게 가장 가까웠던 뱀주사위 놀이는 멸공과 올림픽 입상, 산불 조심등이 중요했던 세태를 반영하는 하나의 창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우리는 열심히 보드 게임을 하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굳혔던 이집트 사람들을 웃어 넘길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뱀주사위 놀이쯤은 옛날 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우리들의 일상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은 가끔 잊혀지곤 합니다. 우리가 즐기는 어떤 종류의 보드게임들이 그런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말이죠.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석권한 시대이고, 이 시대에 개인과 사회를 좌우하는 지고의 가치는 바로 "돈" 입니다. 십자가보다도, 혹은 칼보다도, 금이 더욱 인정받는 사회에선 보드게임도 역시 그 트렌드(?)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겠지요.
돈벌기 게임의 대명사라고 할만한 모노폴리(Monopoly)가 1933년에 나온 이래 (이때가 세계적인 대공황의 와중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인생 게임을 비롯한 수많은 보드게임들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게임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돈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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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국민게임 "부루마블". 고성장의 80년대에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
얼마전에 어떤 TV홈쇼핑에서 경제 교육용 보드게임을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가 만들었다는 이 게임은 물론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인 게임이고, 상당히 부담되는 가격과 좀 싸구려스러운 외관에도 불구하고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런 게임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메헨이자 뱀주사위 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s. 물신주의 풍조에 대해서 삐딱하게 쓴 글이 되어버렸지만 필자 역시 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중생이며 [어콰이어]나 [모던 아트]를 사랑하는 보드게이머입니다. 그저 이 기사를 연재하면서 세상사와 보드게임간의 관계와 근원을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랄까…요.
▶ 보드게임과 전쟁
앞에서는 태고부터 이어져온 보드게임과 신앙의 연관성에 대해 썰을 풀어 보았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의 큰 줄기는 보드게임의 전반적인 역사를 시대순으로 풀어나가는 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만, 일단 근대 이전의 보드게임들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게임들 자체가 워낙 긴 시간을 이어져 내려오고 또 그 시초도 불명확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테마별로 나누어 엮어서 이야기를 풀게 되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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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벼운' 게임과 '무거운' 게임의 예. 보드게임으로써 무겁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토큰과 카운터가 적어도 천여개쯤은 있어야 한다나… (boardgamegeek.com)] |
전쟁에 대한 게임들은 일찍부터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서 따로 발전해왔습니다. 하나는 그저 전쟁을 테마로 하고 있을 뿐인 "가벼운"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한한 실제 전쟁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고 전쟁을 모의 체험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는 "무거운" 게임입니다. 이런 무거운 게임들은 보통 '워게임(wargame)' 이라고 부릅니다만, 앞의 가벼운 게임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적당한 이름이 없습니다. (영미권에서는 war game이라고 띄워서 구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당분간 가벼운 게임들은 '전쟁 게임', 무거운 게임들은 '워게임' 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전쟁게임의 탄생
신앙과 전쟁의 공통점은 둘 다 인류가 좋든 나쁘든 태고적부터 해온 행위라는 점입니다. 원시사회에서도 전쟁은 일상사였고, 인류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기 드문 태평성대의 경우를 논외로 한다면, 언제나 젊고 팔팔한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공동체를 지키거나 부(富)를 찾아 원정을 떠나곤 했습니다. 노인들은 틈만 나면 깃발 날렸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무협지에 가까운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을 테고, 많은 꼬마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사가 되려는 꿈에 부풀었겠지요. 그런 꼬마들은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전쟁놀이로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둑해지거나 날이 궂으면 어떤 꼬마는 집안에 틀어박혀서 돌맹이라든가 나무열매들을 땅에 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적을 휩쓸고 대승리를 거두는 장군이 되는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의 병정놀이이자 전쟁 게임의 씨앗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러 개의 말들을 이용해서 적의 말들을 '잡는' 방식의 게임들, 이를테면 체스나 바둑, 체커, 그외 여러가지 게임들은 이런 까마득한 기원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흥미로우면서 많은 연구가 되어있는 게임은 단연 체스와 바둑입니다. 그중에서 바둑은 사실상 거의 동양 3국(한.중.일)과 그 인근 소국들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체스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전세계로 퍼졌고, 그것이 '전쟁 게임'이라는 성격을 바둑에 비해 분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이번의 테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체스에서 시작해서 전쟁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 체스의 탄생
체스의 기원에 대한 추적은 고대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성행하던 아슈타파다(Ashtapada, '거미'라는 뜻)라는 보드게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슈타파다는 8x8 보드에서 행해진 게임인데, 게임의 규칙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민속 게임들의 흔적에서 미루어 볼 때 보드를 뺑뺑이 도는 경주 게임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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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아쉬타파다 보드의 형태와 스리랑카의 민속 게임 타이암(Thayaam)의 진행 방향] |
도대체 저런 짝수 줄의 보드로는 비슷한 방식의 경주가 될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8x8 보드가 후대의 많은 게임들의 보드로 전용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슈타파타의 인기는 (그게 어떤 게임이었든지 간에) 수백 년간 내려오다가 기원후 5세기경에 홀연 나타난 차투랑가(Shaturanga 혹은 Chaturanga)라는 게임에 밀려서 금세 시들해지고 맙니다. 이 차투랑가라는 게임은 상당히 흥미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조금은 현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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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가장 오래된 차투랑가 게임의 초기 배치, 큰 말들은 순서대로 왼쪽부터 배, 기사, 코끼리, 라자(군주)이다. (chessvariants.com)] |
차투랑가는 앞의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4명의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각각 맞은편에 있는 플레이어가 우군으로 간주됩니다. 말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방법은 배를 제외한다면 현대의 체스와 거의 같은 방식입니다만 실제 규칙은 주사위를 굴려서 움직일 말을 선택하고 갖은 예외규칙이 있는 등 워낙 난잡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여기서 직접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한편 차투랑가로 도박을 하는 방법이 문서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볼 때 내기도 상당히 성행하였을 것 같습니다.
4 인 플레이에 주사위를 굴리는, 말로만 듣기엔 어쩐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보드게임과 비슷해 보이는 방식의 이 차투랑가가 어떤 경위로 주사위가 사라지고 두명이서 하는 게임으로 바뀌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연구자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적당한 플레이어 네 명이 모이는 게 쉽겠어요 두 명만 만나면 할 수 있는 게 쉽겠어요?" 라든가 "하수들이 진 다음에 실력 탓이 아니라 주사위 탓을 하는 게 눈꼴시어서 그랬겠죠."라는 의견도 냈는데 (정말입니다. -_-;)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이론은 "힌두교에서 도박을 금지했기 때문에 게임에서 도박성을 씻어내기 위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정말 도박들을 안했겠습니까만은, 단속이 심해지면 아무래도 오래 걸리는 머리싸움보다는 판이 빨리빨리 도는 도박을 선호하게 되었겠죠. ^_^
주사위가 사라지고 4인용 게임이 2인용으로 압축되면서 이 과정에서 각 플레이어는 같은 말을 두개씩 갖게 되고 (이것이 체스에 같은 말이 두개씩 있게 된 이유입니다) 우군의 왕은 한 등급 내려와서 "총리대신" 혹은 "장군"등으로 불리게 되며 나중에는 체스의 퀸으로 발전합니다. 이미 차투랑가 다음에 등장한 게임 - 7세기에 페르시아의 샤트란즈(Shatranj)는 이미 사소한 차이를 빼고는 현대의 체스와 거의 동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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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샤트란즈의 초기 배치. 체스의 퀸 대신에 장군이, 비숍 대신에 코끼리가 있는 점만이 다르다. (chessvariants.com)] |
재미있는 점은 인도에서 서쪽으로는 게임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파된 반면 동쪽으로는 게임방식이나 보드가 전해지는 과정에 큰 변화를 겪었다는 겁니다. 이건 제 추측이지만, 인도와 유럽간의 왕래가 인도와 중국간의 왕래보다 더 빈번하고 시간적으로 짧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둑은 반대 경로로는 결국 인도까지도 닿지 못했죠.)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면, 어쩌면 중국이나 동남아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체스를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보고 "어 우리도 저런 거 있으면 쓸만하겠다"하고 독창적으로 알파벳을 발명했던 것처럼 "어 쟤네들 재밌어 보이는 거 하네"하고 어깨너머로 본 다음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게임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죠.
▶ 체스와 전쟁
앞서 그 전파과정을 살펴본 대로 체스는 여러 가지 변형을 도중에 뿌리면서 전 세계로 흩어져 나갔지만, 마침내 르네상스의 시대에 들어 이탈리아 지방에서 유행하던 체스가 유럽의 표준으로 정착되는데 성공하고 그 뒤로는 그것이 거꾸로 다른 변형들을 하나하나 치워가면서 전 유럽에 퍼지게 됩니다. 마치 컴퓨터 업계의 표준 싸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체스가 전쟁을 테마로 한 "전쟁 게임"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체스가 실제 전쟁을 그대로 모사한 "워게임"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쉽게 납득하실 분들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옛날에는,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체스가 실제로 "워게임"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워게임의 목적은 "전쟁의 모의 체험"이라고 했습니다만, 일단 이 모의 체험에 있어서는 (기사들의 토너먼트나 마상 창시합 같은 육체적인 스포츠를 제외하면) 체스보다 더 나은 도구가 없었으니까요.
체스나 (넓게 봐서) 바둑은 몇 가지 중요한 전쟁의 원칙들을 피를 흘리지 않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빨리 파악하는 한편 그의 의표를 찔러야 하고, 각 단위부대가 서로를 유기적으로 원호해야 하고, 전투시 적절한 진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전장의 요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등등, 손자병법에 나올만한 원론적인 가르침들은 거의 전부 체스에서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는데, 손자가 병법을 가르치기 위해 바둑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가 중국측 문헌에서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외에 옛날의 실제 전쟁에서도 부대들이 대개는 그다지 역동적이거나 융통성 있게 움직이질 못했기 때문에 그 점에선 체스 말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체스 정도로도 충분히 워게임으로나 재미로 즐기는 게임으로나 문제가 없던 나날이 그 후 수 백 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동안에 전쟁의 기술은 점점 발전했고 특히 화기의 발달로 전쟁의 양상은 점차 바뀌어갔습니다. 그래서 날로 변화해가는 "현대전"의 모습을 체스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17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워 게임은 조금씩 조금씩 체스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복잡하고 정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664 년, 독일의 울름에서 크리스토퍼 바이크만이 쾨니히슈필(왕의 게임)이라는 변형 체스를 만듭니다. 이 게임은 다양한 계급의 장교들과 병종들이 더 넓어진 보드에서 등장하지만 아직은 체스 말들이 좀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 뿐 체스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적으로 펄쩍 뛰어서 1780년, 다른 독일인 헬비그가 워게임으로 한발 더 전진을 이룹니다. 헬비그의 게임판은 매우 넓어져서 1,666칸의 넓이가 되었고 그 안에서 백여 개의 부대들이 움직였습니다. 산이나 마을 같은 지형 개념이 도입되었고, 시야 밖에 있는 적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흔히 전략 게임에서 Fog of War라고 하는 그 개념이죠) 헬비그의 게임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몇몇 나라들의 군대에서 약간의 인기를 끌었고 많은 변형을 만들었습니다만 이제 급격히 변해가고 있는 실제 전쟁의 양상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을 10여년 앞두고 있었고, 또 그 후 10년이면 나폴레옹이 등장할 때였으니까요.
1797 년, 게오르그 벤투리니라는 (달리 어느 나라겠습니까) 한 독일 학자가 더욱 복잡하게 진화된 게임을 발표합니다. 이 게임의 보드는 3,600칸으로 더욱 넓어졌는데, 중요한 점은 처음으로 이 게임에서 실제 지형, 그것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던 프랑스-벨기에 국경지대를 모델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게임에서는 보병, 기병, 포병 등의 각종 병종과 지원 부대들뿐만 아니라, 보급부대들, 심지어 야전 제빵소까지 유닛으로 배치되는 등 보급 개념까지 도입되고 날씨 같은 요소까지 반영되는 등 더욱 실제 전쟁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규칙은 더욱 복잡해져서 60페이지짜리 책자가 되었고 게임 진행은 굼벵이처럼 느려졌습니다.
점점 워게임이 나름의 목표를 향해서 독자적인 발전을 해나가던 이때까지도 아직은 워게임에 체스의 영향이 남아있었습니다. 벤투리니의 정교한 게임에서도 여전히 보드는 체스보드와 같은 사각 말판이었죠.
그리고 이제 마침내 체스에서 완전히 독립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워게임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바다에서, 그리고 육지에서.
육상전의 워게임이 위와 같이 느릿느릿하게 발전하고 있던 즈음, 해상전은 단숨에 상당히 진보된 형태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재미있기에 막간에 잠깐 소개하고 지나갈 까 합니다. 1782년, 존 클라크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이 범선끼리의 전투형태를 연구하여 해전을 도상에서 모의로 수행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을 발표하여 영국 해군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는 풍향과 범선의 움직임, 당시의 무기들의 화력과 그것들이 끼치는 파괴와 손상 등에 대해 먼저 연구를 했고, 그 결과로 그는 함대의 항해와 전투를 위한 워게임(혹은 그에 가까운 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새로운 형태의 전술을 지지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종래의 해전의 양상은 양측 함대가 일렬종대로 기찻길처럼 나란히 전진하면서 포화를 주고받는 식이었는데, 그가 모의전의 결과를 바탕으로 지지했고 이후 영국해군이 본격적으로 도입한 전술은 적의 종대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가 분단하여 공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전술의 효용성은 이후 숱한 전투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당대의 명제독인 로드니 경은 클라크의 공헌을 인정했고, 넬슨도 그 이론을 받아들이고 더욱 가다듬어서 후에 트라팔가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해전의 양상은 아주 넓은 해상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함선이 서로 교전하며, 풍향이나 날씨, 시간 등 환경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등 육전의 조건과 심하게 달랐기 때문에 체스의 마수(?)에서 자유롭게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그러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이 존 클라크라는 사람은 평생 동안 바다에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진~짜 책상물림이었다고 합니다.
▶ 워게임의 탄생 --- 크리크슈필 (Kriegspiel)
19 세기 초, 프러시아의 폰 라이슈비츠 남작이 워게임에 있어 중요한 혁신을 이루게 될 고안에 몰두중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체스 판이나 다름없는 보드 형태에서 벗어나서 실제 지형을 나타낸 모형을 사용하고 부대의 이동을 좀 더 현실적으로 구현하는데 역점을 두고 게임을 디자인합니다. 1811년, 천운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는 자신의 게임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자와 빌헬름 왕자(후의 카이저 빌헬름 1세)에게 시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의 게임이 대히트를 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은, 실제 게임을 하는 사람(지휘관)과 게임의 규칙대로 지휘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따로 두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지휘관은 게임의 복잡한 규칙에 연연할 필요가 없이 실제 군대를 지휘하듯이 이동을 지시하면 되었고, 부관들과 심판은 실제 이동과 결과의 판정을 게임의 규칙에 따라 수행했습니다. 그날 이 젊은 두 왕자들은 그런 지휘에 재미가 들려서 "한겜 더"를 외치게 되었고, 나중에 부왕에게도 이 정교하고도 교육적인 워게임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습니다.
때는 나폴레옹 치세의 말기, 러시아 원정 직전입니다. 프러시아는 이미 프랑스에게 몇 번이나 굴욕적인 패배를 당해야 했으므로,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에 가까운 전쟁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솔깃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황공하옵게도 친히 그 게임의 시연을 관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라이슈비츠 남작은 이 영광스런 소식을 듣고 당연히 기뻐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걱정이 밀어닥쳤으니, "아 이렇게 대충 만든 것을 보여드려도 되나" 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 거죠. 당시 그가 갖고 있던 모델은 테이블 위에 모래로 지형을 만들고 나무말로 부대를 나타내는 정도였는데, 이런 허름한 목업을 보여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남작은 이후 역사적인 프리젠테이션과 시연을 위한 데모 준비작업에 빠져들었습니다.
………
게임장이로써 저도 요즘 세상에 게임을 만들 때 개발과정에서 지나치게 데모에 집착하다가 제작일정을 망치는 경우를 더러 보았는데, 라이슈비츠도 거의 그 꼴이 날 뻔 했습니다. 그의 데모 버전 워게임은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되었고 왕은 그동안 그 일에 대해서 거의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왕은 어쨌든 시연을 할 것을 승낙했습니다. 드디어 시연의 날, 참가자들은 다들 적지 않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라이슈비츠는 게임 전체를 완전히 포터블하고 럭셔리한 테이블로 만들어오는데 성공했으니까요. 거추장스러운 지형 모형대신 그는 지형 타일을 다양하게 조합해서 어떤 지형이라도 만들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그 지형 타일들은 지금 와서 우리가 보기에는 무척 친숙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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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시연에 사용된 바로 그 워게임의 테이블이다. 지형타일들은 웬지 카르카손이 떠오르기도 한다 (Board Game Studies vol.3) ] |
시연에 나온 왕과 다른 참가자들은 그날 밤늦게까지 흥분해서 게임에 몰두했다고 전해집니다.
라이슈비츠는 그 후 계속 크리크슈필의 개량에 전념하지만, 1820년대가 되자 비로소 유럽에 평화가 찾아왔고, 그로인해 워게임의 입장에서는 불운한 시대가 되어서 개발도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역 군인이었던 그의 아들 라이슈비츠가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서 1824년에 마침내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지형 타일을 포기하고 (아까워라…) 게임에 정확한 실제 지도를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전투의 결과에 대해 정교한 규칙을 완성했습니다.
크리크슈필은 이미 워게임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빌헬름 왕세자의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프러시아의 참모총장이었던 폰 무플링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기회에 라이슈비츠의 시연을 끝까지 지켜본 뒤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다! 전쟁 훈련이야! 즉시 전군에 보급해야겠다!"
이로써 라이슈비츠의 업적은 인정받았고, 아들 라이슈비츠는 순식간에 전군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라이슈비츠에게 있어서 영광 뒤의 몰락은 어이없이 빨리 찾아왔습니다. 빌헬름 왕세자나 무플링 같은 열린 사고를 가진 군인들은, 특히 고급 장교들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게임"에 대해 불신과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이 도구를 평가해보는 것조차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하급 장교들이 이런 게임을 통해서 자기 직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하는 경험을 한다면 헛바람이 들어서 군인으로써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겠느냐"는 비아냥도 나왔습니다. 영양가 없는 논쟁은 끝없이 이어졌고, 라이슈비츠는 변방의 근무지로 좌천되었다가 고립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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